서귀포시 대정읍, 남매의 집

건축가 김경란과 사진작가 김도균 남매는 일상을 그들이 더 원하는 장면으로 채우기 위해 제주로의 이주를 결심했다. 치열한 준비, 그보다 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집을 짓고 서울을 오가며 두 집살이를 한 지 2년째. 제주 집에서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 시간은 패치워크처럼 그들의 삶 또한 조금씩 물들여간다.

사는 사람

건축가 김경란과 사진작가 김도균 남매

서귀포시 대정읍 서쪽 마을은 제주에서도 특히 땅이 비옥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광활한 곡창지대가 사방에 펼쳐지고 브로콜리, 양배추 등 특히 좋은 흙이 필요한 작물들이 제철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매일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동네. 건축가 김경란과 사진작가 김도균 남매도 그 땅에 뿌리를 내렸다. 드넓은 벌판 한가운데 섬처럼 솟은 박공지붕 집과 함께.

김경란 소장 부부와 반려견 메이·찬이가 함께 사는 첫 번째 집은 사람에게도, 풍경에도 느슨하게 열려 있다. 우선 1층은 집에서 보면 부엌과 다이닝 공간이지만, 아주 넓은 현관이면서 때로는 공공 영역이 되기도 한다. 김경란 소장이 운영하는 쇼룸 겸 카페를 겸하기 때문이다.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오전 11시~저녁 7시에는 누구나 건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워크숍을 여는 크크르상회로, 그 외의 시간에는 가족을 위한 공간으로 쓰는 중이다. 쭉 뻗은 계단을 오르면 프라이빗한 공간이 나타나는데, 부부의 거실 겸 서재, 침실과 드레스룸은 문 없이 약간의 창과 벽으로만 나뉜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5대 원칙인 자유로운 평면의 제주 버전이랄까. 5대 원칙 중 하나인 수평으로 긴 띠창도 발견할 수 있다. 서재에 앉아 있으면 기다란 창을 통해 들판과 제주 바다의 수평선이 만들어내는 파노라마가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드나든다.

김도균 작가의 스튜디오는 땅의 크기는 비슷하지만 건축면적은 100㎡ 이하로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제주보다 서울 생활의 비중이 높았기에 가운데를 비우고 작업실과 세컨드 하우스 두 동으로 미니멀하게 구성했기 때문이다. 김도균 작가가 김경란 소장에게 요청한 것은 ‘작품 활동의 연장선에 있는 집’.

“저는 건축물을 주로 촬영하고 그중에서도 모듈이나 각 잡힌 형상, 기하학적 미감을 추구해요. 이 집도 제 작업처럼 모뉴멘털하고 미니멀한 장소가 되길 바랐습니다. 이곳의 창문은 모두 제가 쓰는 4×5 필름과 비율이 같아요. 커튼도 시안·마젠타·옐로(색의 삼원색)를 계절마다 바꿔가며 걸고요.(웃음) 보통 학기 중에는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 주말에 오고 방학이 되면 한 달 정도 길게 와 있는데, 대부분의 시간은 작업실에서 보내요. 건너편 집에서는 잠만 자고 마당을 지나 작업실로 출근하곤 합니다.”

기대한 대로만 되지는 않았지만, 일상과 일터가 뒤섞인 집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순간이 흐르고, 그 와중에 보석 같은 찰나를 맞닥뜨린다.

“강아지들을 돌보다가 직원과 통화하면서 일하고, 밥해 먹고 집안일하는 시간이 모두 엉겨 붙어 있어요. 마치 커다란 빈대떡처럼요. 이곳에서도 물론 머리 아프고 복잡한 일은 계속돼요. 그래도 해 뜨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하루가 시작된다는 설렘이 일고, 구름이 너무 예쁘거나 바다가 빛나는 순간을 마주하면 꾸깃꾸깃하던 마음도 개운하게 펴집니다. 여행지에서 그런 모습을 보는 것과 일상을 살면서 그런 순간을 맞닥뜨리는 건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어요. 자연에 열려 있고 관계 맺은 공간에서 받는 에너지가 정말 크다는 것을 매일 느낍니다.”

전문가

건축가 김경란

사무소 개소 13년 차인 김경란 소장과 사진을 매개로 공간을 탐구하는 김도균 작가는 남매이면서 일종의 사무소 파트너다. “분야는 다르지만 서로 교집합이 있었어요. 동생이 전시를 위한 공간적 장치나 도구가 필요할 때면 제가 기술적 도움을 주고, 프로젝트의 콘셉트나 마감재, 특히 색을 결정해야 할 때는 동생이 건축 바깥의 시선에서 조언을 해주곤 했죠. 평소에도 작업에 대해 자주 의견을 주고받아왔고요.” 김도균 작가의 수장고를 위한 랙이나 그의 사진 작품으로 만든 테이블은 그러한 대화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사무소 이름도 두 사람의 이름에서 따와 크크르크득(kkr+kdk) 건축사사무소다. 12년 동안의 공동 사무소 생활은 제주로 스튜디오를 옮기는 일까지 이어졌다.

먼저 이주를 결정한 것은 김경란 소장이었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성수동에서 작업실을 운영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대안을 찾아야 했고, 마침 다닥다닥 붙은 아파트도, 난개발로 망가진 도시에서도 멀어지고 싶던 그가 국토 양 끝단에 자리한 위치만큼이나 모든 것이 서울과 정반대인 제주로 향한 것. 제주에서도 시가지는 처음부터 제외했다. 여러 부지를 살핀 끝에 한라산과 바다를 모두 조망하고, 자연의 기운이 생동하는 이곳에 터를 잡았다. 김경란 소장은 사무실을 겸하는 집을, 교수로 재직 중이라 서울을 완전히 떠날 수 없던 김도균 작가는 작은 세컨드 하우스가 딸린 스튜디오를 짓기로 했다.

“건축물을 설계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주변과의 조화예요. 이왕 제주에서 집을 짓는데, 자신만의 성역인 양 돌담을 세우거나 꼭꼭 닫힌 곳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매일 농사짓는 분들께 요란하지 않게, 너무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바깥의 자연을 향해 확장하는 집이 됐으면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이 땅이었기에 지금과 같은 집이 탄생한 셈이에요.”

건축가가 땅을 읽으며 설정한 개념은 건물의 규모, 각자의 조망과 프라이버시를 해치지 않는 일자형 배치, 높은 층고와 탁 트인 공간, 너른 창, 공간에 딱 맞춰 짜 넣은 수납 가구와 직접 디자인한 모듈 가구까지 구석구석 이어졌다.

집을 바꾸는 것, 동네를 옮기는 것. 집 짓기는 지난날의 삶에서 덜어내고 싶은 부분을 비우고 원하는 시간으로 채우며 삶의 우선순위를 재정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 〈브루탈리스트〉에서 “왜 건축을 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주인공 라슬로가 “정육면체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직접 만들어보는 것”이라 말한 것처럼, 남매가 7년 동안 고군분투하며 완성한 집은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도 그들이 살고 싶은 삶을 더 이해하고, 만들어내며, 선명하게 하는 데 든든한 발판이 되고 있다.

전문가 소개

김경란 크크르크득 건축사사무소

김경란 소장은 자연과 도시, 인간을 위한 공간과 디테일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크크르크득 건축사사무소와 크크르상회를 운영 중이다. 헤이리아트밸리, 세종시 첫마을, 판교 운중지구 등 여러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Unclosed Bricks: 기억의 틈〉 〈뫼비우스의 띠〉 〈협력적 주거 공동체(Co-living Scenarios)〉 등의 전시에도 다수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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