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삶을 완성하는 집, 부암동 라이프

팬데믹 기간에 부암동에 들어와 예행연습을 한 전은경·김용섭 부부는 “집에 있을 때는 서울이 아닌가 싶다가 고개만 넘어가면 바로 서울인” 부암동에 4층짜리 집을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부암동 라이프’를 시작했다. 결정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묵혀두면 오른다는 부동산이나 미국 주식보다 두 눈으로 매일 보는 것이 중요했고, 그렇게 쌓이는 하루하루가 직업적 수명과 성취에도 더 큰 밑거름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는 사람 이야기

전은경·김용섭 부부

이 부부와 일을 해본 적이 있다. 매거진 <C>의 전은경 디렉터는 전 직장 동료다. <행복이 가득한 집>의 발행사이자 ‘서울리빙디자인페어’의 주최사(코엑스, MBN과 공동 주최)인 디자인하우스. 나는 월간지 <럭셔리>에서 일했고 그녀는 <월간 디자인>의 기자를 거쳐 편집장까지 맡았다. 그녀를 생각하면 한 번씩 사장님이 주재하던 회의실 풍경이 떠오른다. 디자인의 부흥이 회사의 사명이었고, 매년 서울리빙디자인인페어와 디자인페스티벌을 주최하는 까닭에 회의를 하다 보면 지금 이 순간 반짝이거나 더 늦기 전 반짝여야 할 디자이너를 찾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럴 때마다 사장님은 한 번씩 전문성을 테스트하듯 “요즘 누가 잘하냐?”를 묻곤 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누가 있지?’ 당황하며 머리를 굴리기 바빴는데, 전은경 편집장은 예상했다는 듯 이런저런 이름들을 잘도 말했다. 산업디자인 쪽에서는 누가 샛별이고, 가구 디자인은 누가 잘하고, 요즘 디자인업계에서 주목받는 트렌드는 무엇이고… 놀랍도록 ‘스무스한’ 답변을 듣다 보면 그녀의 SNS가 겹쳐 떠오르곤 했다. 그녀는 늘 바빴다. 디자이너의 제품 론칭 현장부터 브랜드의 팝업 행사까지 거의 모든 현장에 그녀가 있었다. 마감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실함만으로는 못 하는 일.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녀는 ‘디자인’을 진짜 좋아하고, 디자인이 있는 곳이라면 긴급 순찰차처럼 어김없이 출동한다.

그녀의 짝꿍인 김용섭 대표는 업계에서 알아주는 라이프 트렌드 분석가이자 경영 컨설턴트다. 우리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대기업이 그와 함께 일한다. 매년 초 <라이프 트렌드>도 펴내는데, 담고 있는 내용이 풍성하면서도 뾰족해서 즐겨 읽는다. 그가 뽑은 올해의 트렌드 키워드는 ‘조용한 사람들’. 조용하게 비싼 의자를 사고, 조용하게 쇼펜하우어 책을 읽고, 조용하게 넷플릭스를 보는 사람들의 내향형 소비가 트렌드의 축이 될 거라는 전망. 그의 회사 이름은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이고, 날카롭게 벼른 진단에 기업들은 기꺼이 비용을 지불한다. 나 역시 문화 자산을 주제로 토크를 진행하며 그를 초빙해 강연을 들은 적이 있는데, 과연 모든 통찰이 송곳 같았다.

라이브러리와 시어터 공간으로 꾸민 1층. 빨간 커튼까지 매달아 진짜 극장 같다. 부부는 소파 대신 각자 원하는 의자를 사자고 합의했고 남편은 찰스&레이임스의이 라운지체어를 골랐다.

“좋은 집에 살면 성공할 확률이 높아져”

이 부부가 둥지를 튼 부암동은 결단해야 살 수 있는 동네다. 풍경이며 공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아파트가 거의 없고 지하철도 없기 때문에 편의성을 떠올리다 보면 ‘에이, 안 되겠다’ 하고 마음을 접는 경우가 많다. 이 부부가 구입한 집도 마찬가지였다. 인왕산, 북한산, 북악산이 다 보이는 놀라운 전망에 엘리베이터까지 있는 4층집이었지만 구경하는 사람만 많을 뿐 결단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은경·김용섭 부부는 달랐다. 매일 출퇴근하는 전형적 샐러리맨이 아닌 데다 결정적으로 집에 부여하는 가치가 달랐기 때문이다.

부암동은 매력 있는 동네예요. 우선 뷰가 너무 좋죠. 아침에 눈뜨면 리조트에서 일어나는 기분이 들잖아요. 사람들은 그래요. 아파트에 살면서 투자 가치도 생각하고 리조트는 한 번씩 여행으로 가면 되는 것 아니냐고. 근데 일상이 제일 중요하고 이런 곳에서 매일 일하고 쉬어도 되는 거잖아요.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을 때는 오히려 집을 부동산 가치로만 이해했어요. ‘나도 집으로 돈 한번 벌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하지만 집을 온전히 운영하고 관리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지금은 집이 그냥 온전한 생활의 가치이자 터전이면 좋겠어요.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는 지금 하는 일의 궤적을 최대한 오랫동안 유지하는 거예요. 일을 오래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부동산 가치를 불리는 것이 아니라, 내 몸값을 불리는 게 더 중요해요. 그게 최고의 재테크지요. 집을 투자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는 일상이 없어요. 오늘의 행복을 저당 잡혀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거잖아요. 내 몸값을 올리는 데도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이 집에서 내 일에 집중하며 하루하루 아름답게 사는 것이 우리에게는 이상적인 재테크고 노후 준비입니다.”

그야말로 리조트 뷰를 자랑하는 침실. 단어도 잘 만드는 전은경 디렉터는 “내겐 뷰view 병이 있고 이 황홀한 뷰에 반해 바로 이사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전은경 디렉터가 부연한 말도 흥미롭다.

“세상에는 금전적 성공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생활의 성공도 있지요.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좋은 집에 살면 성공할 확률이 높아져. 웬만한 일은 집에 오면 다 극복이 되니까.’ 공감이 되지 않나요? 집이 좋으면 회복력도 빠르거든요. 영화 <건축학개론>에 나오는 대사도 좋아해요. 건축가인 주인공이 엄마한테 말하죠. ‘엄마는 이 집이 지겹지도 않아? 평생 여기 살면서 고생만 하고.’ 엄마가 화답하지요. ‘아이고, 집이 지겨운 게 어디 있어? 집은 그냥 집이지.’ 우리는 집에 부동산 가치와 미래 가치까지 엮어 너무 무겁게 만드는데, 저희는 그러지 않기로 했어요. 그냥 나를 쉬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집이면 충분한 거죠.

오늘도 우리는 멋지고 근사하고 돈도 되는 집을 꿈꾼다. 어쩌면 크고 모호한 이야기. 특히 미래의 부동산 가치는 내가 통제할 수도 없고 기약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라서 실체가 없는 행복일 경우가 많다. 전은경·김용섭 부부는 그 안개 같은 행복을 좇는 대신 하루하루 생활이 성공적인 집을 택했고, 그 안에서 현재도 열고 미래도 열어나가는 삶을 택했다. 다시 한번 복기해보는 부부의 말.

“오늘이 쌓여 내일이 되는 거잖아요. 오늘의 일상에 우호적일 수 있어야 더 길게 성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이닝룸에서 사이좋게. 식사 준비는 김용섭 대표가 한다. 요리는 안 하느냐는 질문에 전은경 디렉터가 한 말. “제가 요리까지 잘해야 하나요?”(웃음)

고친 사람 이야기

전은경 디렉터와 건축가 강지호

우리가 중시하는 건 생활의 가치와 생활의 성공

전은경 디렉터가 강지호 건축가와 손잡고 구석구석 감각을 더한 집은 또 하나의 콘텐츠라 할 만하다. 1층 엘리베이터 앞에 서면 왼쪽에 4층집의 공간 구성 안내판이 보인다. 1F library/ theater 2F atelier/ archive 3F dining/ residency B 4F everyday resort(mountain view)/ eureka & relax 5F rooftop & observatory. 간략한 설명을 더해볼까. 1층은 도서관이자 극장으로 꾸몄다. 벽 한쪽으로 전면 가득 책이 그득그득 꽂혀 있고, 한쪽에는 매킨토시를 포함한 오디오 시스템이 구비되어 있다. 창가에 두꺼운 빨간색 커튼을 두르고 그 앞에는 찰스&레이임스의 라운지체어를 두었다.

“저희 집에는 소파가 없어요. 뻔한 구성이 싫어 소파를 살 돈으로 각자 좋아하는 멋진 의자를 하나씩 갖자고 합의했죠. 남편은 찰스&레이임스의 라운지체어를 골랐고, 저는 그 유명한 LC4를 골랐어요. 르코르뷔지에의 이름 앞 글자를 따서 LC라고 부르는 건데, 최근 제조사인 카시나에서 이름을 바꾼 것 아세요? 르코르뷔지에, 샤를로트 페리앙, 피에르 잔느레의 합작으로 완성한 의자고 이들이 기여한 바를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LC를 아예 없앴어요. 새 이름은 ‘4 쉐즈 롱 어 레글라지 컨티뉴4 Chaise Longue à Réglage Continu’(그녀가 프랑스어의 감각을 한껏 살려 발음했다)입니다. 저 포스터도 눈에 띄지 않나요? 이탈리아 잡지 <도무스>의 아트 디렉터로 일하던 브루노 무나리가 연출한 퍼포먼스로 만든 포스터인데, ‘불편한 의자에서 편안함 찾기(Seeking Comfort In An Uncomfortable Chair)’란 제목이 붙어 있어요. 종일 일하고 피곤한 상태로 집에 돌아왔는데, 이렇게 앉고 저렇게 앉아도 의자가 불편한 거죠. 비인간적 디자인에 대한 유명한 도발로, 안락의자에서 편안함을 찾기 위한 자세가 사진으로 쭉 들어가 있어요.”

미하엘 토네트의 14번 의자부터 장 프루베의 스탠다드 체어, 필립 스탁의 루이 고스트까지 다 들어가 있는 아틀리에. 전은경 디렉터의 힘은 사서 써보는 데 있다.

2층은 부부가 함께 일하는 아틀리에이자 아카이브. 아카이브는 책뿐 아니라 그녀가 그간 사 모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잡지 기자와 편집장을 하며 디자이너 작업실이나 미술관을 좀 많이 다녔겠어요? 만나고 듣다 보면 저마다 다 좋아서 안 살 수가 없는 거죠.(웃음) 응원하는 마음도 들고요. 저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굿즈 숍에 제일 먼저 가요. 디자인 상품이며 아름다운 물건이 제일 많은데, 놓치면 아쉽잖아요.”

최근에는 일본 출장을 갔다가 하라 겐야가 직접 디자인한 의자 ‘스와리すわり’를 사 왔다. 일본어로 ‘앉다’란 뜻을 지닌 의자는 다도를 하며 무릎을 꿇을 때 엉덩이 뒤로 넣어 앉으면 무릎에 부담이 한층 줄어든다. 의자 탐구 잡지인 <C>를 만들면서 집에 들이는 의자도 늘고 있다.

“저 막 다 사는 사람 아니고 다 사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하하. 장 프루베의 스탠다드 체어(비트라)는 1950년대 대량생산에 용이한 표준 의자가 됐다는 점에서 특별하고, 필립 스탁의 루이 고스트(카르텔)는 18세기 바로크양식 의자가 원형인데 소재는 폴리카보네이트라 혁신의 지점이 확실하지요. 카페 의자로 알려진 미하엘 토네트의 14번 의자도 빼면 안 돼요.(웃음) 모든 디자이너의 꿈이 대량생산인데 그 어려운 목표를 이미 1859년에 이뤄낸 사람이에요. 곡목으로 조립 방식을 구현하고, 이케아 가구처럼 누구나 쉽게 조립할 수 있게 플랫 팩 포장을 했지요. 카탈로그도 따로 만들어 홍보하고요. ‘모던 체어’의 시작점에 이 의자가 있어요.”

욕조를 과감히 밖으로 빼낸 이 참신함이라니! 옆으로는 4 쉐즈 롱 어 레글라지 컨티뉴 의자를 매치했다.

다이닝룸과 게스트룸, 리조트에 버금가는 풍경을 보여주는 3·4층은 부부가 이 집을 계약하는 데 결정적 이유가 됐다. 북악산, 북한산, 인왕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야외 발코니까지 딸려 있어 볕 좋은 날에는 빨간색 페르몹 비스트로 체어에 앉아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집이라니! 이런 풍광과 운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둥근 욕조를 아예 욕실 밖으로 꺼내 창가에 배치하고, 그 옆으로는 앞서 언급한 4 쉐즈 롱 어 레글라지 컨티뉴를 두었다. 그야말로 매일이 리조트이고, 매 순간 유레카를 외칠 것 같은 공간. 서두에 부부가 언급한 ‘생활의 성공’이 빨간 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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