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와 짜임으로 경계 허문 궁극의 미니멀리즘

공간 디자이너 박현희·건축가 윤자윤

글 백세리 기자 | 사진 박찬우

박현희 소장이 직접 제작한 테이블을 놓았다. 둥근 상판과 곡선형 목재 수납장이 석철목의 디자인 철학을 반영한다.

박현희·윤자윤 부부는 벽과 가구의 경계를 허물어 수납 해법을 찾았다. 건축 안에 살림 자리를 마련한 ‘명륜소굴’에서는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품은 벽이 집 풍경을 만든다.

고친 사람 이야기

서울 명륜동 고즈넉한 주택가에 자리한 적벽돌집 ‘명륜소굴’. 1974년에 지은 이 집은 오래된 외관과 달리 현관 너머로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층 사이로 시야가 트이고, 부드러운 곡면 벽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 또 다른 공간이 나타난다. 집 안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금속 원통은 입체적 세트장에 들어선 듯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지하와 1층은 부부가 일하고 손님을 맞으며 때로 전시를 여는 공간이고, 2층은 두 사람의 일상생활을 위한 곳이다. 여러 쓰임을 한집에 담았지만 눈앞의 풍경은 간결하다. 일과 살림에 필요한 물건이 벽과 구조물 안에 제자리를 갖고 있기 때문. 부부는 집을 고치면서 공간 형태뿐 아니라, 그 안에 놓일 가구와 물건의 자리까지 함께 생각했다. 명륜소굴의 수납은 이 집을 설계하는 첫 단계부터 시작된 셈이다.

박현희·윤자윤 부부의 작업 공간인 명륜소굴 1층. 집 안을 관통하는 금속 원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박현희·윤자윤 부부의 작업 공간인 명륜소굴 1층. 집 안을 관통하는 금속 원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기둥과 화장실을 감싼 곡면 벽에 선반을 마련하고, 회전식 덮개를 달았다. 조명과 스피커를 넣어둔 자리는 때론 반려묘 ‘점’이의 캣타워가 되기도 한다.
기둥과 화장실을 감싼 곡면 벽에 선반을 마련하고, 회전식 덮개를 달았다. 조명과 스피커를 넣어둔 자리는 때론 반려묘 ‘점’이의 캣타워가 되기도 한다.
목재 벽을 열면 조리대와 수납공간이 드러난다. 요리를 한 뒤 문을 닫으면 주방은 하나의 단정한 벽면으로 이어진다.
목재 벽을 열면 조리대와 수납공간이 드러난다. 요리를 한 뒤 문을 닫으면 주방은 하나의 단정한 벽면으로 이어진다.

공간과 수납을 함께 설계하다
박현희 소장의 설계 태도는 ‘석철목’이라는 이름에 담겨 있다. 돌을 쌓고, 철을 용접하고, 나무를 깎는 일. 성질도 구축 방식도 다른 재료의 특성을 살리면서 일정한 규칙 아래 연결하는 작업이다. 그는 이를 “독립된 덩어리들이 동일한 제스처 아래 켜켜이 쌓이는 ‘묶여짐’”이라고 표현한다. ‘파르코니도Parconido’에서는 반지름 600mm의 곡선을 반복했고, ‘커빙 블록Curbing Block’에서는 3m라는 높이를 재료와 공간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명륜소굴에서도 먼저 집 전체를 연결하는 형태와 비례의 규칙을 세웠다. 오래된 집을 보강할 기둥과 생활에 필요한 설비 역시 그 안에서 풀어야 할 과제였다. 보강한 구조가 돌출되거나 설비가 제각각 드러나지 않도록 이를 감싸는 벽과 구조물 형태를 함께 다듬었다. 수납은 그 과정에서 생긴 두께와 틈을 활용해 건축의 일부가 되었다.

“공간을 설계한 뒤 가구가 들어오면서 생기는 불협화음이 늘 아쉬웠어요. 그래서 이 집에서는 공간과 가구, 수납이 따로 보이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벽인데 수납을 품고 있고, 구조물이면서 가구처럼 느껴지도록 한 거죠.” 자신들이 살 집은 그동안 느낀 아쉬움을 해결해볼 기회였다. 수납장 크기와 위치를 뒤늦게 정하면 가구가 동선을 가로막거나 공들여 잡은 비례와 어긋날 수 있다. 부부는 벽을 세우고 공간을 나눌 때부터 무엇을 어디에 둘지 살폈다. 냉난방·환기 설비와 배선도 가능한 한 건축 안으로 정리했다. 수납과 설비가 들어갈 자리를 미리 확보한 덕분에 집 전체의 선과 면은 끊김 없이 이어진다.

곡면 목재 벽 사이의 문을 열면 계단실로 이어진다. 문에도 벽과 같은 마감재를 사용해 닫았을 때 경계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곡면 목재 벽 사이의 문을 열면 계단실로 이어진다. 문에도 벽과 같은 마감재를 사용해 닫았을 때 경계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원통을 따라 이어지는 선반에는 부부가 곁에 두고 즐기는 책과 오브제를 놓았다.
원통을 따라 이어지는 선반에는 부부가 곁에 두고 즐기는 책과 오브제를 놓았다.

하나의 형태에 담은 여러 쓰임
집 안팎을 관통하는 금속 원통은 이러한 설계 방식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시작은 현관 위치였다. 부부는 남쪽 마당을 온전히 누리고자 현관을 건물 측면으로 옮겼다. 하지만 도로와 맞닿은 대지 조건상 비를 피할 캐노피를 바깥으로 깊게 내밀 수 없었다. 해결책은 필요한 깊이만큼 원통을 집 안으로 들이는 것이었다.

“약간 일그러진 평행사변형 벽돌집 안에 원통을 끼워 넣었다고 생각했어요. 1층에서는 현관과 신발장이 되고, 2층에서는 계단실과 책장이 됩니다. 형태는 같지만 공간에 따라 쓰임이 달라지는 거죠.” 박현희 소장의 설명이다. 원통은 현관에서부터 집 안 동선을 이끈다. 현관문 안쪽에서 외부 시선을 한 차례 걸러주고, 곡면을 따라 위층으로 오르면 책과 오브제를 놓은 선반으로 이어지며, 침실에서는 방을 감싸는 벽이 된다. 신발장과 책장을 각각 들여놓는 대신 하나의 형태에 층마다 필요한 기능을 담은 것. 집 인상을 결정하는 조형물이 물건을 수납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낮은 천장과 거친 콘크리트, 따뜻한 목재가 어우러진 지하 게스트룸. ‘명륜소굴’이라는 이름처럼 아늑한 아지트를 떠올리게 한다.
낮은 천장과 거친 콘크리트, 따뜻한 목재가 어우러진 지하 게스트룸. ‘명륜소굴’이라는 이름처럼 아늑한 아지트를 떠올리게 한다.

1층 중앙의 곡선 벽도 현장 조건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나왔다. 구조 보강을 위해 세운 기둥 위치가 계획과 미묘하게 어긋나자 기둥과 화장실을 하나의 곡면으로 감쌌다. 사람이 오가는 방향에 맞춰 모서리를 둥글리고, 두꺼워진 벽에는 수납공간을 마련했다. 둥글게 파낸 선반에 조명과 스피커를 넣고 회전식 덮개를 달았다. 필요할 때 열어 사용하고 닫으면 내부를 가릴 수 있다. 때로는 반려묘 ‘점’이의 캣타워가 되기도 한다. 자칫 동선과 시야를 방해할 수 있던 기둥은 이렇게 여러 기능을 품은 벽의 일부가 되었다.

부부가 일하고 손님을 맞는 1층에서는 마당을 향한 전면을 최대한 비웠다. 주방을 비롯한 생활 기능은 뒤편의 긴 나무 벽 안에 모았다. 방을 잘게 나누기보다 필요한 기능을 한쪽에 배치해 사람들이 머무는 자리를 넉넉하게 확보한 것. 문을 열면 그릇·조리 도구와 작업대를 갖춘 주방이 나타난다. 요리를 한 뒤 문을 닫으면 조리 공간은 가려지고 긴 나무 벽만 남는다. 별도 방을 만들지 않고도 주방과 업무 공간을 시각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셈이다. 식사를 준비하고 다시 사람들과 어울리는 1층에서는 문을 여닫는 것만으로 그때그때 쓰임에 맞는 풍경이 만들어진다.

침실의 목재 벽에는 수납장과 에어컨, 드레스룸으로 통하는 문을 함께 숨겼다. 필요한 부분만 열어 사용하고, 닫으면 하나의 벽면으로 이어진다.
침실의 목재 벽에는 수납장과 에어컨, 드레스룸으로 통하는 문을 함께 숨겼다. 필요한 부분만 열어 사용하고, 닫으면 하나의 벽면으로 이어진다.
침실의 목재 벽에는 수납장과 에어컨, 드레스룸으로 통하는 문을 함께 숨겼다. 필요한 부분만 열어 사용하고, 닫으면 하나의 벽면으로 이어진다.

앞으로의 쓰임을 남겨둔 공간
부부의 생활공간인 2층에서는 벽 안에 살림살이를 넣어둘 공간을 마련했다. 녹색 코르크 바닥을 깐 침실 한쪽 나무 벽에 옷장·침구장과 책상을 짜 넣고, 벽 뒤에는 드레스룸과 화장대를 배치했다. 침실에 여러 기능을 모으되 침대에서는 단정한 벽면이 눈에 들어오도록 했다.
“옷과 책, 여행지와 미술관에서 모은 물건이 많은 편인데 물건을 줄이기보다 감추거나 드러낼 자리를 정했습니다. 생활용품은 사용하는 곳 가까이에 수납하고, 곁에 두고 보고 싶은 책과 오브제는 원통을 따라 이어지는 선반에 놓았죠. 벽 안에 일상의 살림을 담았다면, 열린 선반에는 두 사람의 취향을 드러낸 셈입니다.” 윤자윤 소장의 말이다. 침실에 TV와 소파를 두지 않은 선택에서도 물건을 사용하는 때와 방식을 고려한 태도가 드러난다. 영상을 보고 싶을 때만 프로젝터를 꺼내 빈 벽에 투사한다. 평소 비어 있는 벽이 필요할 때면 스크린이 되는 것. 가구를 덜어낸 자리에서는 녹색 바닥과 나무 벽, 그 사이에 놓인 침대가 한층 또렷하게 드러난다. 지하에서는 물건을 보관하는 일과 공간을 용하는 방식을 함께 고민했다. 작업실이자 창고로 쓰면서 직접 만든 가구와 오브제를 놓아두고, 나중에는 전시도 열 수 있도록 계획했다. 1백80도로 열리는 여닫이문과 각을 이루는 벽에도 앞으로의 쓰임을 미리 한정하지 않으려는 생각이 담겨 있다.

“너무 딱 고정된 언어로 설치되면 나중에 아쉬움이 생길까 봐, 쌓였을 때 벽이 되기도 하고 또 떼놓기도 하는 여지를 곳곳에 두었어요.” 이러한 여지는 선반에도 적용된다. 물건을 올려두는 용도에 그치지 않고, 전시 때 작품을 붙여놓을 가능성까지 고려했다. 지금 보관할 물건에 맞춰 수납을 짜는 것만큼 앞으로 다른 방식으로 쓸 수 있게 만드는 일도 중요했던 것이다. 부부에게 지하는 현재의 작업과 살림을 받아들이면서 아직 정해지지 않은 활동도 담을 수 있는 곳이다.
명륜소굴에서 수납은 집을 짓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벽을 세우고 공간을 나누는 순간부터 그 안에 담길 살림을 함께 생각했다. 그렇게 물건마다 제자리를 마련한 집에는 두 사람의 일상이 펼쳐질 여백이 남았다.

틈새에서 시작한 남다른 수납력
간결한 공간은 집에 필요한 것의 자리를 세심하게 마련하는 데서 시작된다. 생활용품은 물론 조명과 설비까지 벽과 틈에 담아낸 네 가지 아이디어를 소개한다.

벽에 숨긴 빛
벽에 숨긴 빛
설비의 틈을 작은 선반으로
설비의 틈을 작은 선반으로
수납 가구 대신 타공판
수납 가구 대신 타공판
우편물도 벽 안으로
우편물도 벽 안으로

1 벽에 숨긴 빛
침대 곁 나무 벽에 세로로 가느다란 틈을 내 조명을 넣었다. 나뭇결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와 별도 벽등 없이 침대 옆을 밝힌다.

2 설비의 틈을 작은 선반으로
초인종과 전기 설비를 넣기 위해 만든 틈을 작은 수납 자리로 활용했다. 안쪽을 나무로 마감한 오목한 공간에 작은 물건과 식물을 놓아 거친 콘크리트 구조 사이에 아담한 장식장을 만들었다.

3 수납 가구 대신 타공판
좁은 벽면에 흰색 타공판을 붙여 가방·모자와 청소 도구를 걸었다. 벽과 같은 색으로 존재감을 줄이고, 별도 수납 가구 없이 자주 쓰는 물건의 자리를 마련했다.

4 우편물도 벽 안으로
고지서와 명세서를 받는 우편함은 외벽에 매입했다. 문에도 주변과 같은 마감재를 사용하고 벽면 분할선을 이어, 닫았을 때는 우편함 위치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전문가

박현희 | 석철목, 윤자윤 | BCHO partners

공간 디자이너 박현희는 인테리어를 전공하고 건설 회사에서 10여 년간 경험을 쌓은 뒤 2022년 석철목을 설립했다. 공간부터 가구와 오브제까지 아우르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sukchulmok.com 건축가 윤자윤은 BCHO partners에서 파트너로 일하고 있다. 두 부부는 명륜소굴을 함께 설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