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재개발 부지, 두 번째 집의 실험

H건축&가구 디자인 스튜디오 사사건건 전중섭 대표

글 정성갑(갤러리 클립 대표, 〈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 사진 박찬우

구기동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전중섭 대표의 집. 방충망까지 열어젖히고 오롯이 풍경과 접속한 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이색적 고유함과 매력을 느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에 와서도 그 여운이 점점 선명해지는 사람이 있다. 건축설계는 물론 인테리어와 가구 디자인까지 집에 관한 모든 기술과 그림을 보유하고 있는 전중섭 대표는 오롯한 주체성으로 빛나는 사람이었다. 상대적으로 시세가 저렴한 재개발 예정 부지에 둥지를 틀고, 그곳에 실험적이고도 아름다운 집을 지어 본인만의 결과 흐름으로 살아가는 사람. 의자와 옷장을 포함해 대부분의 살림을 직접 만들어 채운 그의 20평 남짓한 집은 그 어떤 곳보다도 근사했다.

가구 디자이너이자 건축가인 전중섭 대표는 이 집에 있는 거의 모든 가구를 직접 디자인해 사용한다. 미송 합판으로 만든 아일랜드 식탁에도 담백한 멋이 넘친다.
가구 디자이너이자 건축가인 전중섭 대표는 이 집에 있는 거의 모든 가구를 직접 디자인해 사용한다. 미송 합판으로 만든 아일랜드 식탁에도 담백한 멋이 넘친다.

그가 알려준 주소지에서 내리자마자 그 땅에 반하고 말았다. 자하문터널을 지나 5분 남짓 더 들어가 만난 구기동의 야트막한 언덕. 3층짜리 건물 일곱 개 동이 너른 땅에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지상 공간은 버스 주차도 가능할 만큼 넓었고, 주변으로는 오래된 나무가 가을볕을 받으며 한적하게 서 있었다. 어느 한편에 고추를 말리는 멍석이 깔려 있어도 이상할 것 없는 풍경이었다. ‘역시 고층 아파트보다 이렇게 오래된 저층 연립이 좋아’라고 잠시 생각했다.

사는 사람 이야기

전중섭 대표의 환대를 받으며 둘러본 집은 모든 가구와 배치, 레이아웃과 기운이 오롯이 개별적인 고유의 세계였다. 가장 먼저 주방이 보이고, 주방 너머로는 베란다가 있다. 베란다 통창으로는 건물 뒤편으로 자리 잡은 초록 숲이 펼쳐진다. 주방 앞쪽으로는 미송 합판으로 길게 만든 수납장과 벽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데, 그 가운데 방문처럼 크게 뺀 사각 개구부가 있다. 턱 면적이 제법 넓어 한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뻗어도 충분한 컨디션이다.

뒤쪽의 흰 벽을 유심히 보시길. 전중섭 대표가 직접 만든 벽화로, 이렇듯 곳곳에 수공예적인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뒤쪽의 흰 벽을 유심히 보시길. 전중섭 대표가 직접 만든 벽화로, 이렇듯 곳곳에 수공예적인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역시 직접 만든 조명과 수납장 안의 오디오 시스템. 클래식부터 재즈까지 마음의 무드를 천천히 고양시키는 음악을 자주 듣는다.
역시 직접 만든 조명과 수납장 안의 오디오 시스템. 클래식부터 재즈까지 마음의 무드를 천천히 고양시키는 음악을 자주 듣는다.

놀이터처럼 그곳을 넘어가면 전중섭 대표가 컴퓨터 작업을 하는 책상이 있고, 그 옆으로는 오디오계의 명기인 데논Denon사의 네트워크 기기와 클립쉬Klipsch사의 스피커가 턴테이블을 중심으로 포진해 있다. 그날의 BGM은 데니 킨Denny Keane의 ‘The Water is Wide’. 이 노래를 명확히 하는 이유는 성가 같은 목소리와 묵직한 첼로 선율이 아득하게 좋아 나부터도 다시 듣고 싶기 때문이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 풍경은 거실의 통창이었다. 방충망마저 시원하게 열어젖힌 창. 확 트인 시야로는 구기동 일대의 주택과 마을, 그 사이사이 큰 나무가 마치 한 점의 수채화처럼 펼쳐졌다. 공간 설명을 조금만 더 하자. 거실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침실이 있고, 오른쪽 개구부를 따라 들어가면 또 하나의 거실이 나온다. 앞쪽 거실이 작업하기 좋은 조건이라면 이곳은 그가 직접 만든 의자도 있고, 조명도 많아 밤에 나른하게 퍼져 위스키를 마시기 좋아 보였다. 가장 눈에 띈 것은 그가 직접 ‘그렸다는’ 벽화. 규사와 제소를 섞어 되직하게 만든 다음 무딘 칼로 무늬를 그려나가면 이렇게 단 하나뿐인 나만의 그림이 만들어진다.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다시 작은 공간이 나타난다. 역시 그가 직접 만든 옷장과 이케아에서 구입한 작은 책상. 상부에는 단정한 선반을 만들어 아껴 읽는 책을 진열하고, 가는 레일을 교차하듯 걸어 천도 내리고 그림도 걸 수 있게 했다.
그가 만든 옷장과 조명, 의자와 병풍은 독창적으로 아름답다. 가구는 움직이는 것이라 생각해 뒷모습까지 완벽하게 디자인하고 어쩔 수 없이 기계의 도움을 받지만, 삐뚤삐뚤한 손 느낌이 좋아 철 막대를 구불구불하게 만들고 장식이자 기능인 금속 별까지 한 점 한 점 캐드로 더 정교하게 찍어 공장에 맡긴다. 주로 실용적인 합판을 쓰면서도 색과 디자인, 장식과 기능을 감각적으로 절충해 묘하게 낭만적이고 정취 가득한 작품들. 그런 작품들로 채운 공간은 다시 나름의 분위기와 질서를 확보하며 개별적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전중섭 대표의 아이디어 노트. 작은 설계도이자 화집이기도 하다.
전중섭 대표의 아이디어 노트. 작은 설계도이자 화집이기도 하다.
현관에서 가까운 첫 번째 거실. 벽에 올려 건 수납장 디자인이 돋보이는데, 표면 그림은 그가 아크릴 물감으로 직접 그린 것이다.
현관에서 가까운 첫 번째 거실. 벽에 올려 건 수납장 디자인이 돋보이는데, 표면 그림은 그가 아크릴 물감으로 직접 그린 것이다.

좋은 삶은 나를 좋은 곳에 데려가는 것에서
“2019년,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도 재개발을 앞둔 곳에 집을 마련했어요. 이태원동과 보광동을 아우르는 우사단길이었습니다. 그곳에서 3년을 지냈는데, 목공 장비까지 사서 직접 고쳐 살았어요. 전기 배선도 직접 하고요.
23.14㎡ (7평)에 불과한 공간이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좁지도 않았어요. 침실에만 벽을 치고 나머지 공간은 장면 장면을 커트하듯 입체적으로 디자인한 데다 가구가 들어가면 가용 공간이 적어지니까 벽에 레일을 걸어 옷장처럼 활용하는 식으로 궁리를 많이 했거든요. 이 집 역시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곳인데, 시세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데다 원상 복구할 필요가 없어 이런저런 공간 실험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 좋아요. 재개발 부지는 사연도 많아요. 이 집은 등기는 되어 있는데 건축물대장은 없어서 전세 보증금 대출이 쉽지 않지요. 매매를 하기에도 여건이 좋지 않고요.

베란다에서 바라본 주방과 거실. 양옆으로 배치한 나무 가구 역시 그가 직접 디자인하고 만든 것들이다. 손기술이 점점 퇴화하는 시대라 더 멋있고 야무져 보이는 르네상스 맨!
베란다에서 바라본 주방과 거실. 양옆으로 배치한 나무 가구 역시 그가 직접 디자인하고 만든 것들이다. 손기술이 점점 퇴화하는 시대라 더 멋있고 야무져 보이는 르네상스 맨!

집을 볼 때는 네이버 부동산을 애용하는데, 꼭 위성 지도로 주변 등고선까지 확인합니다. 홍제동부터 일곱 곳을 봤는데, 이런 악조건에도 앞뒤로 펼쳐진 숲과 산이 너무 좋아서 바로 결정했습니다. 이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이른 아침입니다. 동트는 5~6시에 일어나 일을 시작하거든요. 아무도 전화를 하지 않을 시간에. 커피를 내리고 기분이 천천히 고양되는 노래를 틉니다. 그렇게 출근 준비전까지 일을 하면 반드시 뭔가 나온다는 믿음이 있어요. 스스로 그렇게 입력시킨 것 같습니다.(웃음)”

상부 디자인도 이렇게 매력적이다. 가는 레일을 교차시켜 가벼운 오브제나 천을 걸 수 있게 하고, 선반을 마련해 보는 책을 올려두었다.
상부 디자인도 이렇게 매력적이다. 가는 레일을 교차시켜 가벼운 오브제나 천을 걸 수 있게 하고, 선반을 마련해 보는 책을 올려두었다.
조리 도구마저 ‘그림’인 주방 한편. 일상을 즐길 줄 아는 이 남자는 피자도 직접 구워 먹는다.
조리 도구마저 ‘그림’인 주방 한편. 일상을 즐길 줄 아는 이 남자는 피자도 직접 구워 먹는다.

그의 첫 직장은 지난달 ‘라이프&스타일’ 컬럼에 소개한 디자인 스튜디오 더퍼스트펭귄이었다.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그는 인테리어 회사에서 할 수 있는 건축 일이 궁금해 그곳을 택했고, 이후 실험적이고 위트 넘치는 작업으로 유명한 푸하하하프렌즈 건축사사무소에서 4년을 근무했다. 그렇게 건축사자격증 응시에 필요한 실무 3년을 채웠고, 건축사 시험도 통과했다. 건물의 설계와 인테리어디자인, 가구 제작이 모두 가능한 ‘능력자’가 된 것이다. 두 회사를 거치며 그가 추구하는 디자인 어휘와 철학은 이렇다. “‘건축설계가 너무 고정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삶이 계속해서 바뀐다면 집도 그런 변화를 반영할 수 있을 만큼 가변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단열이나 방수 및 환기처럼 중요한 것들만 충실하게 해결한다면 모든 공간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모든 방에 콘크리트를 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공간의 성격과 분위기는 가구로도 충분히 조율할 수 있거든요. 그 때문에 가구는 움직일 수 있어야 하고, 이동 가능하니 뒷면까지 완벽하게 설계해야 해요. (책상 옆 수납장을 가리키며) 이 가구도 원래는 바닥에 있었는데, 이사를 하면서 이렇게 벽에 올려 달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접합부나 연결 구조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요.

표준화되고 도식화된 방법 대신 신박한 묘법을 찾는 것도 좋아합니다. 언젠가 할머니 집에 갔는데, 화장실 문에 고무줄을 달아서 자동으로 여닫게 만들어놓으셨더라고요.(웃음) 자주 사용하면 고무줄이 적당히 늘어나고 문도 더 천천히 닫히게 되지요. 이런 것을 로 테크라 생각하고, 생활의 디테일이자 재미라 여겨요. 이런 아이디어를 활용하면 독일이나 일본에서 생산한 하이테크 부품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않아도 되지요. 마지막으로는 손의 질감을 중시해요.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수많은 천장화를 봤는데,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그린 그림이라 ‘좋은’ 느낌을 받았어요. 깊은 기운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기계로 딱 잘라 만든 것에서는 그 공정만큼이나 분절된 시간과 에너지가 보이는 것 같아요. 차갑고 건조하지요. 어떤 제품이나 공간에서 사람들의 시간이 느껴질 때가 좋아요. 시간을 들여 끝내 완성해낸 의지가 느껴질 때도 좋고요. 집도, 가구도 그렇게 만들고 싶습니다.”

가장 안쪽에 있는 작은 서재의 한편. 오른쪽 개구부에서 보듯 다양한 크기로 자유롭게 열리고 닫히는 구조 덕분에 공간 곳곳이 한층 입체적이고 리드미컬하게 보인다.
가장 안쪽에 있는 작은 서재의 한편. 오른쪽 개구부에서 보듯 다양한 크기로 자유롭게 열리고 닫히는 구조 덕분에 공간 곳곳이 한층 입체적이고 리드미컬하게 보인다.
주방을 중심으로 한 컷. 하부의 세탁기가 보이는지. 수납의 미학까지가 이 집의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퍼즐이다.
주방을 중심으로 한 컷. 하부의 세탁기가 보이는지. 수납의 미학까지가 이 집의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퍼즐이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집’에 관해 여러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파트만 집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넓게 보면 이 도시에는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고쳐 쓸 만한 집이 많고, 전중섭 대표 같은 사람을 알고 있으면 그 과정이 한결 재미있고 수월해진다.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문화 콘텐츠를 애독하고 잡지를 보는 것이 힘이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잡지는 건축과 인테리어, 디자인과 가구, 그것들을 움직이는 사람에 관해 들려주고, 그런 이야기를 아는 것은 곧 응용 가능한 나의 옵션이 되어 내 삶에 한층 다양한 방법과 가능성을 심어준다.

아버지가 산업디자인을 전공하셔서 어릴 때부터 ‘디자인’과 친숙했어요. 인테리어에도 관심이 많아 기회가 될 때마다 옷장과 책상 위치를 바꾸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공간을 더 크게 갖고 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막연하지만, 공간을 가지면 나를 가질 수 있겠다 싶었지요. 건축을 전공한 배경입니다. 그런 유년기의 기억도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사회에서 더 많은 걸 배우고 느꼈습니다. 제가 다닌 회사에는 멋지게 사는 선배와 동료가 많았습니다. 더퍼스트펭귄에 있던 디자이너 한 분은 결혼식을 아담한 레스토랑에서 했어요. 양가 가족만 단출하게 모시고 음식을 나누며 오붓하게 식을 치른 거죠. 결혼식을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다른 분들도 많이 떠오르는데, 그들에게 집의 크기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어요. 작은 집에 살면서도 친구들과 자주 맛있는 걸 먹고, 좋은 시간을 보내는 분이 많았거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뭔가 더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삶을 꿈꾸게 됐습니다.” 결국 좋은 삶은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인터뷰를 마치고 커피 컵을 가져다놓으며 다시금 주방을 살피다 보니 선반 한 곳에 있는 제면기가 눈에 들어온다. 이탈리아 여행을 하며 파스타를 먹다 보니 면을 직접 맛있게 뽑아 먹고 싶어 구입했다고. 행복하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30대 중반의 대표는 피자도 직접 구워 먹는다. 언젠가 피자 파티를 함께 하기로 했는데, 그날을 벌써부터 기다리게 된다.

가장 안쪽에 있는 작은 서재의 한편. 오른쪽 개구부에서 보듯 다양한 크기로 자유롭게 열리고 닫히는 구조 덕분에 공간 곳곳이 한층 입체적이고 리드미컬하게 보인다.
가장 안쪽에 있는 작은 서재의 한편. 오른쪽 개구부에서 보듯 다양한 크기로 자유롭게 열리고 닫히는 구조 덕분에 공간 곳곳이 한층 입체적이고 리드미컬하게 보인다.

스튜디오 사사건건(@saasaakunkun)은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더퍼스트펭귄과 푸하하하프렌즈에서 인테리어와 건축설계를 배운 전중섭 대표의 첫 번째 브랜드이자 사무실 이름이다. 인테리어디자인과 가구 제작은 물론, 상공간과 아틀리에 등 다양한 공간의 건축설계까지 진행하는 전천후 스튜디오이기도 하다. 고정된 벽체나 기둥 대신 이동 가능한 가구를 중심으로 유연하고 독창적인 공간을 구현하는 데 능하다. saasaakunk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