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과 정원과 공원이 있는 집

집에서 몇 발짝 거리인 공원에서 반려견 비노와 산책하기, 벽난로 앞에 모여 앉아 타닥대는 소리 듣기, 정원에서 블루베리 따 먹는 참새 관찰하기…. 정준 씨 가족이 20년 넘게 살아온 아파트를 정리하고 주택을 지어 살기 시작한 지 1년째. 가족은 동네와 관계 맺고 계절의 변화를 발견하며 그들에게 꼭 맞춘 집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중이다.

사는 사람

3인 가족 & 열 살 반려견 비노

증권 회사에서 일하는 정준 씨와 아내 조명진 씨, 대학생이 된 딸 그리고 열 살 된 반려견 비노는, 오랫동안 살던 아파트를 떠나 자신들만의 주택을 짓기로 했다. 신혼집으로 시작했던 아파트에서 아이가 성장하고 대학생이 될 때까지 살아왔지만, 아파트의 단조로운 삶에서 벗어나 자신들에게 꼭 맞춘 입체적인 공간을 꿈꿨다.

부부는 골프장이 아닌 전시회와 공연을 찾아다니고, 여행을 가도 맛집보다 건축에 더 관심이 가는 사람들이었다. 와인과 식물, 그림과 사진, 요리 등 각자 좋아하는 것이 뚜렷했고, 특히 집에는 조명진 씨가 그린 그림과 80여 개의 식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이닝 공간에 마주 앉은 조명진 씨와 정준 씨, 그리고 반려견 비노. 정준 씨가 가꾸는 식물도 이곳을 채우는 주인공이다.

“아파트 단지는 편리했지만, 단조롭고 재미가 없었어요. 늘 마음 한쪽에는 주택에 대한 로망이 있었습니다. 나에게 맞춘, 더 입체적인 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두 사람은 언젠가 집을 지을 계획으로 틈틈이 동네를 찾아다녔다. 후암동, 서촌, 팔판동, 소격동 등 다양한 동네를 걸으며 살고 싶은 장소를 상상했다. 도심 속 주택, 문화시설과 가까운 곳을 원했고, 마침 마음에 두었던 부지를 하루 만에 매입할 수 있었다.

“한옥과 양옥이 어우러진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고, 상업 공간이 적어 조용하고 깨끗했어요. 면적이 작았지만 공간을 잘 구성하면 충분히 살 수 있겠다 싶었어요.”

한옥과 양옥 사이로 가만히 조화를 이루는 집의 모습. 규모는 대지면적 110㎡, 연면적은 142㎡이다.

“대부분 노후를 보낼 집으로 근교의 전원주택, 마당 넓은 집을 생각하는데, 저희는 좁더라도 교통이 편리하고 문화시설이 가까운 도심을 원했어요. 주말이면 아내와 함께 후암동이나 서촌, 팔판동, 소격동 등 여러 동네를 거닐며 어디서 살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매물이 드문 이 동네의 부지를 나온 지 하루 만에 매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듯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인 결과였다. 그동안 둘러본 여러 동네 중에서도 가장 좋았다. 한옥과 양옥이 어우러진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고 상업 공간이 적어서 조용하고 깨끗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면적이 작았지만 공간을 잘 구성하면 살기에는 충분하겠다 싶었다.

건축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부부의 기준은 뚜렷했다. 젊고 감각적인 디자인을 하는지, 손발을 맞춰 온 시공팀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목조 건축보다 공간 구성이나 분위기 면에서 선호하던 콘크리트 건축 포트폴리오를 살폈다.

“이룩은 건축가로는 드물게 시공팀을 직접 관리하고 있었고, 제주도에 설계한 스테이 프로젝트도 마음에 들었어요. 결과적으로 집을 짓는 몇 년 동안 순탄하지 않을 때가 많았는데, 문제가 생길 때마다 매끄럽게 조율해줬습니다.”

2층까지 5m 가까운 높이를 뚫어 만든 보이드 공간.

이곳에 이사 온 뒤로 정준 씨는 진정한 식집사가 되었다. 매일 아침 세 개 층을 오르내리며 80여 개의 식물에 물을 주는 일이 그의 일상이 되었다. 정원에는 그라스와 남천나무를 직접 심었고, 식물들이 잘 자라주는 모습에 만족감을 느꼈다.

조명진 씨는 동네를 탐험하며 종로구의 매력을 새삼 발견했다. 예전에는 1동, 2동처럼 구획된 아파트 단지에 살았지만, 이제는 사간동, 소격동처럼 각자 이름과 이야기가 있는 동네가 더 ‘우리’라는 느낌을 준다고 했다. 가족은 새집을 통해 각자의 취향과 지나온 추억을 담으며, 약간의 불편함조차도 그들만의 루틴으로 받아들였다.

전문가

건축가 김영필

이 주택을 설계한 이룩의 김영필 소장은, 처음 프로젝트를 의뢰받았을 때부터 걱정이 앞섰다고 털어놨다.

“주택이 밀집해 있고 골목도 좁으며, 각종 규제가 까다로워 철거나 지하 공사부터 어려움이 많을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러했습니다.(웃음)”

정준 씨 가족에게는 왜 집을 짓게 되었는지, 어떤 집을 원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를 하나하나 질문하며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영필 소장은 이러한 대화를 바탕으로 이 집의 설계 키워드로 ‘페어링(pairing)’을 제안했다.

부부의 침실. 평소에는 소파 베드를 접어두고 작은 거실처럼 사용한다. 왼쪽 사진은 조명진 씨의 아버지가 취미로 촬영한 작품, 오른쪽 벽에 걸린 그림은 조명진 씨가 직접 그린 것

김영필 소장은 이 집을 설계하면서, 가족뿐만 아니라 이 집이 주변의 풍경과 어떻게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실내와 외부가 조화를 이루되, 실내에서는 프라이버시를 충분히 지키면서도 빛이 잘 들도록 하고, 외부에서는 주변 건물의 색감이나 형태가 은은하게 비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반 층씩 어긋나는 스킵 플로어 구조와 5미터 높이의 보이드 공간, 그리고 유리블록으로 이뤄진 파사드를 적용해 빛과 공기, 시선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했다.

계단 아래 공간을 활용해 만든 1층 현관 옆 화장실.

완성된 집은 스킵 플로어 구조와 계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좁은 면적을 극복하면서도 쓸모와 재미를 모두 갖춘 공간으로 완성됐다. 현관으로 들어와 계단을 반 층 내려가면 나타나는 반지하 공간은 가족이 함께 사용하는 주방과 다이닝 공간으로, 가장 넓고 층고가 높은 이곳에서 부부는 식사를 하고, 책을 읽고, 와인을 마시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계단을 따라 올라간 1층은 부부의 침실과 욕실 공간으로, 한 층 더 올라가면 딸의 방과 미니 거실 겸 서재가 자리한다. 다이닝룸을 중심으로 5미터 가까운 높이로 뚫린 보이드 공간 덕분에 집 전체에 공기와 소리가 잘 통해 가족 모두가 서로의 존재를 살필 수 있다. 특히 반려견 비노는 이 보이드 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며 가족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루프톱 테라스에서는 남산타워, 송현동 녹지광장의 모습이 가득 펼쳐진다.

또한 옥상에 마련한 테라스는 이 집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송현녹지광장을 내려다보고, 반대편으로는 북악산과 인왕산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서울의 경관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는 장소다.

집의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핵심 요소는 한쪽 파사드 전체를 채운 유리블록이다. 김영필 소장 역시 이 유리블록을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꼽았다. 그는 주변과 교감하면서도 존중받는 집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유리블록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실내에서는 프라이버시를 지키면서도 빛을 충분히 들이고, 외부에서는 주변의 건물 색감이나 형태가 은은하게 스며드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유리블록으로 채운 파사드는 벽돌이나 기와를 쌓아 올린 한옥 담장 같기도 하고, 은은하게 빛이 비치는 한지 창호 같기도 하여 동네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실내 또한 주변 한옥과 잘 어울리도록 기와나 목재 구조체와 비슷한 톤의 목재, 질감이 살아 있는 미장 콘크리트, 한지를 덧댄 칸살 창호, 장식 기와 등 전통 요소를 담아 마감했다.

전문가 소개

김영필 스튜디오 이룩

스튜디오 이룩은 2010년 김영필 소장이 개소한 이후, 깊이 있는 시선으로 일상을 바라보고 삶에 닿는 이야기를 해석하며 공간과 사람을 잇고 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 유연한 시각으로 설계, 시공을 하며 내일을 함께 그려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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