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에 산다는 건 조금 독특한 주거 생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옥살이는 인간과 집, 집과 자연이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위치를 감각하는 일이다.
사람 사는 이야기
유경상·김지운 씨 부부와 아들 시헌 군
실핏줄처럼 한옥 사이사이로 골목이 나 있는 서울 북촌 한옥마을. 관광객과 여행객으로 박작이는 좁고 굽은 길목을 따라 올라가면 삶의 숨결이 고스란히 깃든 일상이 존재한다. 각양각색의 사람과 풍경을 뒤로한 채 오르고 또 올라 허벅지 뒤가 뻐근해지고 숨이 슬슬 턱끝에 차오를 무렵 우뚝 솟은 한옥 한 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가희동 33번지, 소오헌이다.

문을 열고 들어선 193m2 한옥 소오헌의 왼편에는 바람에 흩날리는 오죽이 손을 흔들듯 줄기와 잎눈을 흔들었다. 누마루와 툇마루가 환히 맞이하는 ㄷ자 구조의 소오헌에서 눈에 띄는 건 누마루 난간 장식. 대개 한옥 하엽은 연꽃 모양을 새기는 것이 일반적인데 소호헌의 하엽은 홍당무였다.
“한옥 시공과 설계를 맡은 참우리건축사사무소의 김원천 소장이 터에 얽힌 설화를 얘기해줬어요. 이곳의 지형이 전쟁을 마친 장군이 돌아가는 길에 쉬어가는 곳이라고 하더라고요. 좋은 기운이 오래 머무르고 갔으면 하는 마음을 담고자 하였죠. 이 집에 홍당무를 놓으면 말이 잠시 멈추지 않을까 싶어 홍당무 모양으로 하엽을 만들었어요.”
한옥 이곳저곳에 가족의 의미를 아로새긴 김지운 씨. 5년 전만 해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고층에 살았다. 전망 좋은 집이라 부를 법한 환경이었으나 어쩐지 개방감보다는 고립감이 느껴졌다. “별도 잘 들고 전망도 좋은 집이었어요. 살기 나쁘다고 보기에 어려웠죠. 그런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타고 외출하는 일상은 계절의 변화랄지 주변 환경 변화를 몸소 느끼기에 한계가 있더라고요.”

해외에서 오랜 생활을 하며 잦은 이주를 하던 김지운 씨 부부는 도시 삶의 패턴에 변주를 줘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어느 날 남편이 이야기 하더라고요. 우리가 한국에 살고 있다는 정체성을 온전히 느끼기에 아파트 생활에는 한계가 있을 것 같다고요.” 김지운 씨 가족에게 집이란 자신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기 위한 좌표와 같았다.
“우연히 지인의 한옥을 간 적이 있는데요, 그때 느꼈어요. 이런 집이라면 우리가 어느 지역의 어느 위치에서 땅을 밟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이후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북촌 골목 이곳저곳을 다니며 터를 물색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오르막을 오르고 또 올랐다. 그러다 한 장소에 다다랐다. 아래로는 기와가 물결처럼 넘실거리고, 뒤로는 인왕산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처음 집을 구할 때 중요하게 생각한 건 막히지 않은 조망과 우리가 한옥마을 안에 위치했다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이곳이 딱 그랬어요.”

마음 내키는 대로 슬슬 거니는 삶
온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공간은 툇마루다. 보통의 툇마루는 1.2m 정도인데 소오헌의 툇마루는 1.5m다. 마당 면적을 좀 잃더라도 툇마루를 키우자는 판단 덕에 얻은 것은 분명하다. “날씨와 계절에 상관없이 잠옷 차림에 맨발로 어제나 하늘을 보고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이 생겼어요. 우리 집만의 ‘실외 거실’이 생긴 것이죠. 사계절 풍경과 공기를 외출하지 않더라도 즐길 수 있는 공간은 아파트 베란다나 서양식 주택의 테라스와는 그 느낌이 전혀 다르더라고요.”

부부는 이곳에서 봄가을에는 책을 보기도 하고, 비나 눈이 올 때는 하늘을 보며 계절을 마음에 담기도 한다. 아들 시헌 군도 툇마루를 자주 찾는다. “어떨 때는 혼자 아이스크림 하나 꺼내 먹으면서 대자로 뻗어 있을때도 있고요. 속상한 일이 있거나 고민이 있을 때 누마루에 달린 난간 있는 툇마루 구석에 혼자 앉아 있디고 하더라고요. 여기가 집에서 제일 좋대요.” 시헌 군에게 직접 그 이유를 물었다. “집 안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놔도 더워요. 근데 툇마루에 앉아서 맞는 자연 바람은 시원해요.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나무에 누워 있는 느낌도 좋아요. 여기 가만히 앉아 있으면 별생각 안하게 되거든요.”

집이 사람의 삶을 규정한다고 생각하는 김지운 씨. 한옥살이 3년 차 된 가족에게는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남편은 집에 올 때면 매번 휴가를 가는 기분이 든다고 말해요. 하루의 상당 시간을 도심 한가운데에서 보내다 한옥마을 입구로 돌아오면 새소리와 벌레 소리가 들리고, 이웃집 된장찌개 냄새가 나는데, 그게 꼭 다른 세계를 오가는 느낌이라나요?”
지운 씨는 이전 삶과 달라진 부분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계절 변화뿐 아니라 절기를 느끼면서 우리를 둘러싼 자연을 섬세하게 바라보게 됐어요. 아, 그리고 아파트 살 때보다 좀 더 많이 움직이게 됐어요. 한옥은 특성상 날씨에 따라 계속 신경을 써야 해요. 비가 오면 나무가 불어나니 창문이 잘 안 열리기도 하고, 어떨 때는 물이 샌 적도 있고 그러다 보니 매일 일어나서 집 이곳저곳을 한 번씩 둘러보게 돼요. 우리 가족을 돌봐주는 집을 저 또한 돌봐주는 거죠.”

소오헌이란 이름은 도연명의 <음주> 제7수 소오동헌하(동쪽 처마 아래서 휘파람 불며 노니니)에 착안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거니는 삶, 풍류를 즐기고자 하는 염원을 담았다. 그 의미대로 두 사람은 저녁이면 지하 와인 셀러에서 그날에 어울리는 술과 음식을 고른 다음, 툇마루에 모여 앉아 하루를 마무리한다. 아들 시헌 군은 툇마루 구석에서 쉬기도 하고, 누마루에서 아빠와 함께 기타를 친다. “한옥살이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마음의 여유와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안목, 그리고 지금이 순간을 온전히 음미하는 법을 선물해줬어요.”
지은 사람 이야기
참우리건축사사무소 김원천 소장
동쪽에는 조선 시대부터 북촌4경으로 유명하던 북촌 한옥마을의 기와물결, 서쪽으로는 겸재 정선이 감명받아 그렸다는 웅장한 인왕상 풍경. 남편과 김지운 씨는 차경을 들이는 것을 소오헌의 핵심으로 삼았다. 좋은 집, 좋은 한옥을 오랫동안 지어온 참우리건축사사무소의 김원천 소장 또한 소오헌을 보고 비슷한 생각을 했다.
“한옥에서 차경이란 풍경을 들이는 거지만, 동시에 이 집이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죠. 서쪽으로 인왕산을 볼 수 있다는 말은 반대로 생각하면 이 집이 인왕산 동쪽에 있다는 얘기가 되거든요.”

땅이 지닌 풍경 자체로 고스란히 잘 담고자 창호를 어디에 위치시키면 좋을지부터 정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아침 햇살과 함께 한옥마을을 내려다보고 가족이 함께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동쪽에 주방과 식탁을 배치했다. “탁 트인 구조 덕분에 아이가 아일랜드에서 마주 보고 숙제를 하거나 대청에서 노는 모습, 혹은 서재에서 공부하거나 책을 보는 모습을 한눈에 살필 수 있어요. 또 반대편에는 노을 지는 인왕산을 움직이는 액자처럼 볼 수도 있어요. 이 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예요.”
전문가 소개
김원천
김원천 소장이 이끄는 참우리건축사 사무소는,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건축을 지향한다. 좋은 집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궁리하는 건축가와 대한민국 최고 장인들의 손길로 격조 높은 집을 짓기 위해 노력한다. chamoore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