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하는 것도 많은 현대인. 꽉 찬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른 채 한 해가 또 시작되고야 만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나의 깊은 내면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유. 오랜 시간 ‘행복’을 논해온 조근호 변호사는 공간에 여유가 있어야 삶에도 여유가 생긴다고 말한다. 나만의 규칙에 따라 정돈된 완벽한 세계. 그의 경험을 담은 리추얼로 새해를 시작해보자.
사는 사람 이야기
변호사 조근호
피안의 세계
저는 퇴근할 때마다 손님이 들어서기 전 호텔 로비나 카페처럼 우리 집이 잘 정돈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문을 열면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집니다. 그래서 예전에 몇 번 집 전체를 인테리어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면 집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갑니다. 아무리 잡지에 소개될 정도로 인테리어를 잘했더라도 집은 생활공간이라 몇 달이 지나면 혼돈과 무질서의 싸움에서 늘 패하고 맙니다. 저는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 정리 정돈법을 공부하고, 곤도 마리에의 미니멀리즘에 심취하기도 했지만 그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리된 공간에 대한 열망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지난 2년간 일본을 자주 다니면서 일본 인테리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찰이 주는 정갈함과 편안함은 ‘나도 이런 공간을 소유하고 싶다’는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일본 인테리어 요소 중 ‘반듯함’에 매료되었습니다. 불필요한 것을 버리는 단순함은 반듯함과 어우러져 공간에 웅숭한 깊이를 만들어줍니다. 방 곳곳에 자리한 ‘직선’은 이 반듯함을 떠받치고요. 생각해보니 저는 늘 직선으로 구성된 공간을 꿈꾼 것 같습니다.

직선 공간 요소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칸살문’ 입니다. 칸살문은 다른 문처럼 이 공간과 저 공간 사이를 꽉 막지 않습니다. 통과되는 빛이 두 공간을 이어줍니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듯한 그 미묘함이 삶을 바라보는 자세를 여유 있게 만들어 줍니다.마지막으로 일본 인테리어에서 배운 것은 ‘와비사비’ 개념입니다. 와비わび는 완전하지 않은 것, 사비さび는 오래된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일본의 미학적 개념입니다. 저는 공간은 완전할 수 없고 늘 새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와바사비 정신이 깃든 공간을 소유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다가 저희 사무실 근처에 있는 카페 B2에서 그런 공간을 만났습니다. 일본식 인테리어를 한 카페였습니다. 저는 그 공간을 인테리어한 분을 소개받아 레어 레이어 박종성 대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대화 끝에 B2에서 진화된 버전의 카페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아파트는 두 세대가 함께 또 따로 쓸 수 있도록 구성한 세대 분리형 구조입니다. 양쪽 중 한 세대의 부엌 및 식당과 거실, 약 25평 정도의 메인 공간을 과감하게 ‘카페’로 변신시킬 수 있는 이유이죠. 카페 공간은 모두 직선으로 구성했고, 칸살문이 다섯 쪽 있습니다. 두 겹으로 만든 커튼을 치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됩니다. 일본 교토의 어느 찻집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공간에는 다른 물건을 절대로 둘 수 없습니다. 마치 모델하우스처럼 장식장도 텅 비어 있습니다. 아마 몇 년 후에 이 공간에 와도 처음 인테리어한 직후와 같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이 공간에 대한 철칙입니다. 제가 집에 머물며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새벽 5시입니다. 어둠이 가시기 전 그 공간에 들어서 부엌 쪽 등만 켭니다. 그러면 칸살문 사이로 거실 쪽에 빛이 들어옵니다. 거실의 검은색 차탁에 앉아 차를 마십니다. 그리고 쇼팽의 녹턴 작품 번호 9번 두 번째 곡을 듣습니다. 가장 일상적인 공간을 가장 낯설게 만드는 공간의 마술. 그 순간만큼은 제가 ‘피안의 세계’의 주인입니다. 공간의 힘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 글 조근호

Interview 조근호 변호사, 레어 레이어 박종성 대표
진정한 행복을 위한 공간
누구나 온전히 행복만을 위한 공간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조근호 변호사. 행복을 위한 ‘피안의 세계’로 절대적 룰을 적용하는 ‘절대공간’을 제안했습니다. 이름부터 호기심을 자아내는 절대공간은 나와 내가 만나는 아주 특별한 곳으로, 그의 절대공간은 현관부터 주방으로 이어지는 집의 공용부입니다. 그 흔한 찻잔 하나 나와 있지 않을 만큼 극도로 절제된 곳이지요. ‘어떻게 이런 공간이?’라는 의문이 생기던 찰나, 중문 옆 비밀의 문을 열자 삶을 이어가기 위한 무질서의 공간이 나타났습니다. 현관을 중심으로 비슷한 넓이의 주방과 거실로 나뉜 평면구조를 십분 활용한 겁니다. 이런 특별한 공간을 주문한 주인공인 조근호 변호사와 설계자인 레어 레이어의 박종성 대표에게 비일상적 공간이 주는 낯선 위로와 정리 정돈 리추얼의 행복론을 물었습니다.
절대공간을 만들게 된 계기가 있나요?
조근호 공간은 우리 삶을 지배합니다. 즉,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행복해지는 공간에 있으면 되는 것이지요. 제가 이곳을 만든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저는 정리 정돈된 공간에 극도의 가치를 두는 타입인 데 반해, 아내는 그 부분에 관용적 타입이라 공간의 혼란과 무질서 문제로 다투곤 했습니다. 그래서 집 면적 3분의 1에 해당하는 이곳을 절대공간으로 만들고, 무엇도 추가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테이블 배치부터 텅 빈 세팅까지 주거 공간보다는 상업 공간에 가까워 보이는데요, 설계 과정과 이곳만의 특색이 궁금합니다.
박종성 조근호 변호사님은 첫 만남부터 의도가 명확하셨습니다. 되레 처음에는 제가 주거라는 틀에 갇혀 있었죠. 그때 절대공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고, 두 번째 미팅에서는 제가 그 개념을 확실히 이해했음을 새로운 시안으로 보여드렸습니다. 먼저 와비사비를 제 방식대로 재해석했습니다. 와비의 소박함은 덜어냄으로, 사비의 오래된 멋은 소재로요. 그래서 공간에 곡선을 포함한 모든 장식적 요소를 배제했습니다. 극도의 깔끔함을 위해 모든 문에 돌출된 손잡이마저 없앴죠. 직선으로 정갈함을 극대화했다면, 마감재를 고를 때는 5년 후, 10년 후의 공간을 떠올렸습니다. 가죽이 에이징되듯 가구와 벽 모두 세월의 흔적을 격조 있게 담아낼 원목 같은 소재를 사용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낡아가는 공간이 아닌 익어가는 공간을 의도했습니다.
절대공간을 만들더라도 가장 어려운 건 꾸준히 유지하는 일이죠. 정돈된 모습을 유지하는 노하우를 공유해주세요.
조근호 맞습니다. 완전한 미니멀리즘은 삶이 정지되어야만 가능하니 집의 모든 공간을 정지시키는 일은 불가능하지요. 따라서 한 공간을 정하길 추천합니다. 단 두 평짜리 화장실이라도 행복을 위해 비용을 투자해보세요. 언제든 찾을 수 있는 나만의 여행지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생각보다 저렴하게 느껴질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공간은 무질서를 허용해야 합니다. 상수도가 있으면 하수도가 있어야 하듯 정리 정돈된 공간을 소유하려면 무질서의 공간 역시 필요합니다.
박종성 완벽한 세팅이 흐트러지는 가장 큰 원인은 짐입니다. 그래서 곳곳에 숨은 수납장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죠. 특히 변호사님의 절대공간 속 핵심은 정리 정돈이었기에 수납장 자체가 있다는 사실도 드러나지 않게 히든 도어 및 벽과 동일한 소재 등으로 철저히 숨겼습니다. 주방처럼 어쩔 수 없이 짐이 나오게 되는 공간은 칸살문으로 은근히 가렸는데, 공간의 시작점에도 칸살문을 달아 새로운 공간으로 향하는 장치가 되도록 의도했습니다.
나만의 절대공간을 찾기 위한 방법이 있다면요?
조근호 나를 잘 아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잘 모르겠다면 지난 3년간의 다이어리를 펼쳐보세요. 그동안 일어난 이벤트에 점수를 매겨보면 내가 어떨 때 행복감을 느끼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내가 온전히 컨트롤할 수 있는 곳에 구현하면 됩니다. 집이 아니라면 나만의 산책길이나 카페도 좋습니다. 나 자신과 동행하며 “너 행복하니? 어떨 때 행복하니?”라며 질문을 건넬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절대공간을 만든 뒤 일상에 변화가 생겼나요?
조근호 제가 만든 이 공간은 저에게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합니다. 우리는 늘 쫓기며 살다 보니 인생의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이 공간은 늘 제 삶의 현재를 인식하게 해줍니다. 제 삶과 대화하고 호흡하며 진정한 삶을 선물하는 공간인 것이지요.
비일상적 공간이 주는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박종성 해방감입니다. 여행이 즐거운 이유 중 하나도 일과로부터 벗어나 휴식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인데, 그와 같은 감각을 언제든 누릴 수 있는 셈이니까요. 어느덧 두 달가량 조근호 변호사님이 이곳을 활용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느낀 점이기도 합니다. 디자이너로서 앞으로도 이곳을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하지만 조금 더 멋스러워진 모습으로 즐기길 바랍니다.
이 멋진- 공간을 소개해주신 분은 서울시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창업 촉진, 기업 성장, 산업 육성에 기여하는 서울경제진흥원(SBA) 김현우 대표입니다. 행복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실천을 이어온 조근호 변호사의 집 리모델링 소식을 듣고, 그의 집과 삶을 통해 <행복> 독자들이 영감을 얻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추천해주셨습니다.
전문가 소개
박종성 스튜디오 레어 레이어
공간을 연출한 박종성 대표는 인테리어부터 가구까지 공간 디자인 전반을
책임지는 스튜디오 레어 레이어를 이끌며 사람과 사물, 그들의 이야기를 공간에
한 겹씩 쌓아 다층적 디자인을 완성한다. 대표 프로젝트로는 조근호 변호사가
영감을 받은 카페 B2와 프린트베이커리 사옥, 새들러하우스, 투아투아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