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고 막아서 더 넓어지는 집

지난여름, 한강 풍경이 아름답게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 김지영 씨 가족이 새 둥지를 틀었다. 20년 전 집을 고칠 때 함께한 트위니 심희진 대표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춰 완성한 164㎡ 아파트 수선기.

지난여름, 한강 풍경이 아름답게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 김지영 씨 가족이 새 둥지를 틀었다. 20년 전 집을 고칠 때 함께한 트위니 심희진 대표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춰 완성한 164㎡ 아파트 수선기.

김지영 씨 집의 중심이자 가족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주방과 다이닝 공간. 아이보리색 타일, 헤이의 테이블과 의자, 하얀 그리드창이 모여 따뜻한 장면을 이루고 있다.

주택 짓기가 주관식 시험이라면, 아파트 찾기는 오지선다형 객관식 문제와 비슷하다. 지역과 규모, 평면 등 주어진 조건에 맞지 않는 선택지를 하나씩 제하며 가장 적절한 보기를 골라 나간다. 아파트 레노베이션은 정답을 완벽히 맞힐 수 없고 포기해야 할 부분도 많은 이 객관식 문제를 주관식 문제로 한 차원 이동시키는 방법이다. 아이들의 학업 때문에 자주 이사를 하다 정착하기로 결심한 김지영 씨도 새로운 아파트로 가족의 거처를 옮기며 같은 과정을 밟았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독립할 때가 다가오면서 당분간은 다함께 살다가, 나중에는 부부가 호젓하게 노후를 보낼 집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동안 자주 집을 옮기다 보니 나에게 잘 맞춘 공간을 꾸리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고요.”

복도에서 바라본 주방. 집의 중심인 주방에 어디서든 쉽게 오갈 수 있도록 여러 곳에 통로를 두었다.
주방은 하나로 트여 있던 공간에 창호를 설치해 가전 존을 분리했다.

시끄러운 도심보다는 자연과 가까운 한적한 단지, 옹기종기 붙은 평면보다는 각 방의 프라이버시가 어느 정도 확보되는 복도식 평면, 아이들에게 넓은 방을 내어줄 수 있는 구조 등 여러 조건을 비교하며 가족에게 최적의 아파트를 찾았다. 그러다 거실의 두 면에서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양창형 평면이 특히 마음을 설레게 만든 집을 발견했다.
함께할 디자이너는 이미 마음에 두고 있었다. 20년 전, 네 가족의 첫 집을 고칠 때 함께한 트위니 심희진 대표다. “그때도 원하는 디자이너에게 레노베이션을 의뢰하고 싶어서 잡지를 엄청 봤어요. 그러다 심희진 대표님을 발견했습니다. 당시에는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인테리어를 공장에서 찍어내듯 작업하는 업체가 대부분이었는데, 대표님이 고친 집은 달랐어요. 창 한 짝, 타일 한 장, 손잡이 하나까지 스타일이 뚜렷했고, 그것이 모여 만들어내는 편안한 무드가 마음에 들었지요.”
두 사람은 선호하는 분위기도 비슷했지만, 특히 공간감이 잘 맞았다. 심희진 대표는(<행복> 2024년 12월호에서도 볼 수 있듯) 공간을 구성하는 감각이 뛰어난 디자이너다. 탁 트여 있지만 어딘가 허전한 공간에 살을 붙이고 조닝을 더해 가족의 생활이 알맞게 채워질 바탕을 만들어주는데, 그 밀도가 김지영 씨의 스타일과 딱 맞았던 것.

거실은 반려 고양이의 털과 스크래치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까사미아의 하얀색 소파를 먼저 고르고, 그에 맞춰 나머지 소재를 정했다. 창을 일부 막고 설치한 갤러리창과 격자창은 이곳을 주택처럼 느끼게 하는 요소다.

이번에도 심희진 대표는 옷을 수선하듯 공간을 재단하며 살기에도, 보기에도 좋은 배경을 만들었다. 복도는 벽을 원래보다 20cm 정도 안쪽으로 들여 일부러 공간을 줄이고 수납장과 얇은 책꽂이를 더했다. 주방은 맥없이 흩뿌려져 있던 영역을 세 가지로 구분해 짜임새를 갖췄다. 안방을 좁히고 만든 수납장, 아들 방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설치한 벽, 딸 방에서 영역을 구분하는 벽도 모두 디자이너가 새롭게 더한 요소다. “공간이 탁 트여 있는데도 뭔가 시원하지 않고 썰렁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이럴 때 적절한 구성이 필요합니다. 가족의 생활에 맞춘 면적을 만드는 것이 인테리어의 첫 번째 단계인데,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특히 주방에 신경 썼어요. 생각해보면 주방과 다이닝은 집에서 가장 자주 오가고 여러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이에요. 요리와 설거지 및 식기를 보관하는 메인 주방, 가족이 식사하는 다이닝, 냉장고와 커피 머신 등 주방 가전을 모두 모은 존으로 용도를 분명하게 구분해 각자의 동선이 뒤섞이지 않고 쾌적하게 쓸 수 있도록 했어요. 가전은 소재와 색감이 천차만별이라 한데 모아서 분리하는 것이 미적으로도 좋습니다.”

폭이 애매해 휑하게 느껴지던 복도는 벽을 늘리고 얇은 크립토나이트 책장을 더해 수납과 공간감을 한번에 해결했다.

김지영 씨 집에서는 부엌이 중심에 위치하고 어디서든 쉽게 오갈 수 있도록 열려 있다. 여기에 디자이너의 적절한 구성이 더해져 가족은 거실보다 부엌을 서로 만나는 구심점으로 이용하게 됐다. 창 크기를 조절해 탄생한 주택 같은 거실도 디자이너의 솔루션. 건너편 아파트가 보이는 곳은 과감히 막고, 가장 적절한 한강 뷰에 맞춰 창 크기를 재설정했다. 멀쩡한 창을 막는다고 하면 본능적으로 우려가 들지만, 어떻게 막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전형적인 아파트 슬라이딩 창호 대신 사용한 격자창과 갤러리창은 아파트를 주택 같은 분위기로 만들어준다. 갤러리창은 차폐를 조절하고, 격자창의 그리드는 공간의 시각적 밀도를 채워주는 효과도 있다. 그 결과 격자창 너머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에 탄생한 고양이 존에서는 낮이면 반려 고양이 두 마리가 햇빛을 받으며 한가로이 졸거나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현관은 테라코타 무드의 타일과 크림색 수납장으로 간결하게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인테리어를 완성하는 가구와 조명은 디자이너와 집주인의 공통된 취향에 쐐기를 박는 존재. 가구 브랜드에서 오래 근무한 김지영 씨가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과정이기도 하다. 일부 공간은 가구를 먼저 고르고 그 디자인과 배치에 맞춰 공간을 설계하기도 했을 정도. 복도에는 크립토나이트의 얇은 책장을 찾고 적절한 수납 깊이를 확인한 후에 그에 맞춰 벽을 얼마나 들일지 결정했고, 거실은 고양이의 스크래치와 털 날림에 가장 영향을 적게 받는 하얀색 패브릭 소파를 주문한 뒤, 그에 맞춰 공간도 아이보리 톤으로 통일했다.

돌레란의 모션 베드를 둔 침실. 거실과는 다른 변화감을 주기 위해 바닥을 타일로 마감했다.
딸의 방에는 벽을 세워 운동 존을 따로 마련했다. 왼쪽 헤드보드 겸 화장대는 주문제작하고 소파와 색을 맞춘 것.

“집에 잘 어울리는 것도 좋지만 시간이 흘러도 잘 쓰일 만한 아이템을 고민했습니다. 모으고 보니 취향은 어쩔 수 없는지 따스한 무드의 북유럽 가구가 대부분을 차지하더라고요. 조명은 특히 애정을 기울여 골랐어요. 벽과 바닥 곳곳에 고심해서 선택한 스폿 조명을 설치해 여기저기 따뜻한 빛을 풍성하게 자아냅니다.” 김지영 씨에게 아파트를 고치는 과정은 변하지 않은 취향을 확인하고, 그때와 달라진 라이프스타일을 발견하기도 하며 다시금 가족의 삶에 맞춰 집을 재정비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며 살아보니 확실히 내 집이 주는 안정감이 있더라고요. 아이들은 성년이 되고, 저희는 노년을 바라보는 변화의 시기에 집을 고치면서 우리와 비슷하게 나이 들어가는 집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의도한 대로 꾸민 집이 주는 충족감을 요즘 새삼 느끼고 있어요.”

안방 욕실. 테라코타 무드의 타일로 마감하고, 집주인의 로망이었던 사우나를 더해 가장 극적으로 변했다.

심희진 대표에게도 20년을 지나 다시 이어진 이번 프로젝트는 그의 일에 대해 돌이켜보는 기회가 됐다. “인테리어는 디자이너가 원하는 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집주인 편에서 삶의 공간을 정리해주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어요.” 1개월 반의 설계, 2개월의 공사 기간 동안 두 사람은 디자이너가 제안하고 클라이언트는 결정하는 일방적 관계이기보다 협업자처럼 같은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그 결과 완성된 집은 디자이너의 스타일도, 집주인의 취향도, 가족의 생활도 적절히 녹아 있다. 다시 20년쯤 지나, 두 사람의 아름다운 회합이 또 한 번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보며.

전문가 소개

심희진 트위니

인테리어 디자이너 심희진은 매거진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다 가구와 뷰티 브랜드의 리테일 공간, 주거 공간의 인테리어디자인으로 업역을 넓혔다. 현재는 인테리어디자인 트위니의 대표로, 렌털 스튜디오 픽시즈를 함께 운영하며 오래 머무를 따뜻하고 편안한 집을 만들고 있다.

조병수 조병수건축연구소

건축가 조병수는 조병수건축연구소 대표로, 하버드 대학교와 독일 국립대학교 등의 대학에서 설계와 이론을 가르쳤고, 2014년에는 덴마크 오르후스 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미국 건축 잡지 <아키텍처럴 레코드>에서 ‘세계의 선도적 건축가 11인’에 선정된 바 있다. 2023년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았다. 오는 4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모스카파트너스 베리에이션MoscaPartners Variations 전시를 맡아 작업중이다.

    사진

자료 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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