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Time, 작가 허명욱의 시간이 쌓이는 곳
허명욱 작가의 경기도 용인 작업실에는 손수 디자인하고 제작한 높이 5m, 길이 15m의 거대한 장이 있다. 작은 서큘레이터 하나도 옻칠해 자신만의 에디션으로 만들 정도로 집요한 미감을 지닌 그가 오래 남기기로 한 사물만 이곳에 자리를 얻는다. 옻칠 작품, 사용하던 카메라, 일본에서 구입한 저울, 빈티지 가방, 즐겨 보는 책…. 그는 작업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 장 앞을 오가고, 눈에 밟히는 사물의 위치를 조금씩 바꾼다. 무언가 눈에 든 시간이 쌓이고 관계를 이루며, 이곳은 매일 새로운 장면으로 거듭난다.
Experiment, 디자이너 최중호의 프로토타입 실험실

뼈대만 있는 의자, 분리되는 테이블, 마감되지 않은 제품. 디자이너 최중호의 오피스에는 그동안 디자인한 프로토타입만 모아두는 방이 있다. 그중에는 판매하는 제품도, 제작 문턱을 넘지 못해 세상에 나오지 못한 것도 있다. “작업을 하다 보면 스케치나 컴퓨터 화면 속에 있던 디자인을 처음 실물로 제작하는 단계를 경험하게 돼요. 디자이너에게는 긴장과 걱정, 설렘, 오만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가장 소중한 순간이죠.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맞닥뜨리는 순간이기도 하고요. 기쁨과 상처, 기대가 공존하던 그 첫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한 아카이브입니다.”
Living, 인테리어 디자이너 손명희의 살림 도구 아카이브

집을 가꾸고 위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삶을 꾸리는 라이크라이크홈 손명희 대표에게 주방은 최애 장소이자 놀이터다. 주방에서 유일하게 문이 없는 이 장에는 아스티에 드 빌라트 그릇, 모비엘 구리 냄비부터 매일 먹는 바나나, 앞치마와 키친 클로스, 시계와 연필이 한데 모여 정물화 같은 풍경을 짓고 있다. 그는 이곳을 보며 일상에서도 아름다움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을 확인한다. “이 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저 감상하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생활도 섞여 있기 때문이에요. 먼지가 앉을 겨를이 없을 정도로 매일 쓰지만 나무와 위빙으로 시작해 구리, 도자로 서로 다른 소재가 그러데이션을 이루도록 하는 보여주기 전략도 있죠.”
Taste, 건축가 구만재의 취향이 모이는 집

매직 박스라 일컫는 이 가구는 건축가 구만재에게 또 하나의 작은 건축이다. 평소 닫혀 있던 장은 사람들이 모일 때 이따금 열린다. 지인들과 만나며 하나둘 모인 위스키와 술잔, 인센스와 향초, 찻잎과 찻잔이 차례로 등장한다. “누군가 같이 먹자며 사 오기도 하고, 여행 갔다가 생각났다며 선물하기도 하고, 함께 주고받으며 채워지는 곳이에요. 사무실은 일하는 장소이지만, 이 장이 열릴 때면 조금은 느슨한 시간을 보냅니다. 닫혀 있을 때는 묵묵하지만 열어보면 여러 레이어가 존재하고, 그곳을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흘러나오지요. 그러고 보니 저희가 만들고 싶은 공간과도 닮아 있네요.”
Collection, 박여숙 관장의 과거와 오늘이 만나는 컬렉션

“초등학생 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서 산 와당이 저의 첫 컬렉션이었어요.” 박여숙화랑 박여숙 대표는 첫 컬렉팅의 기억을 아직도 품고 있다. 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오래된 민예품을 곁에 두고 사는 삶을 이어왔다. “민예품에 깃든 미학을 좋아해요. 부유하지는 않아도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아는 풍류가 있었죠. 적당하고 간결하며 단순한 미. 그 아름다움이 한자리에 모인 곳이 저희 집입니다.” 미국 앤티크 숍에서 구입한 초록색 빈티지 장 안에는 뉴욕 크리스티에서 구입한 한국 민예품부터 지인에게 선물 받은 물건까지 평생 모아온 컬렉션이 포개져 있다. 그는 매일 사용하고 자리를 옮기며 물건과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예술은 생활 속에서 즐기는 것이라는 그의 태도를 보여주는 장소다.
Work, 섬유공예가 최희주의 작업이 시작되는 무대

자연물에서 얻은 위로와 응원의 마음을 담아 바느질 작품을 짓는 작가 최희주의 자그마한 한옥 작업실. 책상과 벽장에 옹기종기 모인 천과 실은 작업 재료인 동시에 함께 작품을 만들고 응원을 건네는 존재다. “시선이 가장 많이 머무는 곳에는 실패와 줄자 등 아름답다고 여기는 도구를 둬요. 집중하다가도 문득 고개를 들어 그것들을 볼 때면 예뻐서 계속 있고 싶고, 더 작업하고 싶어져요.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 그린 그림이나 메모도 살짝살짝 끼워놨어요.” 쌓아둔 천도 옅은 색에서 진한 색으로 나름의 규칙이 있다. 어떤 날은 그중 마음에 드는 천을 골라 펼쳐놓고 뭘 만들까 상상하며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좋아하는 물건이 모인 이 작은 무대에서 매일 새로운 작업의 막이 오른다.
Memory, 사진작가 구본창의 기억이 축적되는 함

사진작가 구본창은 사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제 곁에 남는 것은 마음을 움직인 것, 지금 움직이는 것, 언젠가 움직일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들을 일단 버리지 않고 모아두는 습관이 있어요.” 첫 번째 상자에는 작품을 대형 롤 인화지에 출력하기 전 테스트한 인화지를 보관해두었다. 배우 이정재와 장동건의 포트레이트, 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와 〈두 여자의 집〉 홍보용 미니 달력이 아직 상자를 지키고 있다. 두 번째 상자의 낙엽은 오래전 독일 유학 시절 주워 온 것이다. “반점이 생겼지만 더 이상 부패하지 않고 일종의 무늬로 남은 것이 아름다웠어요. 마치 나이 든 얼굴의 검버섯처럼 각기 다른 자신만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촬영은 끝났지만 그것이 변해가는 모습도 의미 있고 아름다울 수 있다. 그의 인생은 그렇게 사물이 마음을 움직인 순간이 차곡차곡 쌓여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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