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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건물에는 공동의 기억이 깃든다. 골목 모퉁이 슈퍼,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 마을 어귀의 시계탑 같은 것들. 동네의 랜드마크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시간이 쌓이며 일종의 기억 보관소가 된다. 서촌에서 디자인 숍 겸 위스키 바 ‘무용소’를 운영하던 고현·윤진영 씨 부부가 지난겨울 둥지를 튼 집은 그런 은행나무 같은 장소였다.

인왕산 자락이 흘러 내려온 암반 위에 단단히 뿌리내린 건물. 정직한 벽돌 벽에 얇고 긴 창이 정갈하게 나 있고, 맞붙은 건물까지 같은 입면이 이어져 더욱 깊은 인상을 남기던 곳. 동네 사람들은 이곳을 ‘백년양옥’이라 불렀다. 누군가는 일제강점기 노동자나 선교사를 위한 숙소로 지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그러기에는 구조가 너무 좋다고도 했다. 유럽풍 외관이 아름다워 집주인과 친한 이웃이 옆집을 똑같이 따라 지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세월이 흐르면서 주인이 바뀌고 용도도 달라졌지만, 건물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부동산 투자나 개발 수익보다는 이 건물이 지닌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이곳에 머물렀다. 그렇게 1백 년의 시간을 이어온 건물에 부부가 새로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프리랜서 에디터이자 출판사 무용소를 운영하는 남편 고현 씨와 제품 디자이너로 일하며 폴카랩이라는 이름으로 패턴 아트워크 작업을 하는 아내 윤진영 씨는 2020년 무용소를 열면서 서촌과 인연을 맺었다. 무용소는 두 사람의 작업실인 동시에 낮에는 윤진영 씨의 디자인 소품을 판매하는 숍으로, 밤에는 고현 씨의 취미인 위스키 시음 공간으로 운영하던 곳이다. 부부는 무용소를 연 후로 좋아하던 이 동네를 더욱 애정하게 되었다. “구옥을 고쳐 살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왔지만 서촌에 오면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게 됐어요. 서촌에서 매물로 나온 오래된 집은 웬만하면 다 봤죠. 하지만 늘 하나씩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부동산에서 이 집이 나왔다는 거예요. 지나다니면서 항상 ‘멋지다, 예쁘다’ 하며 보던 바로 그 건물요.”

“사람은 태어났을 때 완성된 존재가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집도 태어난 후에 계속 자라는 과정 중에 있는 것 같아요. 1백 년 된 이 집도 저희와 살면서 그다음 30년, 40년 고치고 가꾸고 또 함께 자라가면 좋겠습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집
부부는 서촌을 잘 알고, 이 건물에 애정을 가진 건축가가 레노베이션을 맡아주길 바랐다. 서촌에 사무소를 두고 작업하는 오헤제건축 이해든 소장은 설계를 맡고서 자신이 잘 알던 그 건물이라 무척 기뻤다고. “서촌 주민들은 대부분 이 건물을 알고 있어요. 설계를 하는 동안 ‘이 건물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죠. 심지어 이 집을 고친 시공사 직원도 여기 벤치에 앉아 데이트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더라고요.(웃음) 단일 건물이 마을 전체의 기억을 품고 있다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이렇게 오래 살아남은 건물이 거의 없으니까요.”

이해든·최재필 소장은 시간성을 지닌 것은 드러내고, 시간성을 가리고 있는 것은 걷어내는 것부터 레노베이션을 시작했다. 막혀 있던 3층의 목조 천장,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고창高窓, 1백 년 전의 흔적을 간직한 구조체가 모습을 드러내자 건물이 품고 있던 시간이 보였다. 여기에 부부의 삶을 위한 공간을 얹을 방법을 고민했다. 건축가는 새로 만드는 것도, 본래의 모습도 서로로 인해 그 아름다움이 더 또렷하게 드러나길 바랐다. 그리고 이 집에는 서로 다른 시간 외에 서로 다른 공간의 감각도 존재했다. 바로 집 안으로 무심히 들어와 있던 암벽. 마을의 길 또한 집의 영역까지 흘러 들어와 집과 마을의 경계가 모호하게 뒤섞여 있었다. 두 소장은 이 암벽을 안팎의 감각을 조절하는 장치로 보았다. 이를 경계로 오래된 시간성을 지킨 부분은 외부가 되고, 그 안에 또 다른 내부(새로운 집)를 지어 집 속의 집을 만들기로 했다.

완성된 건물은 층마다 용도와 진입 방식이 모두 다르다. 갤러리 겸 숍으로 임대 중인 1층은 큰길에서 바로 들어가고, 길 사이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2층 무용소 작업실이 나타난다. 문을 열면 퍼블릭한 쇼룸 겸 전시 공간이 맞이하고, 거대한 암벽이 드러난 중정 같은 곳을 지나면 안쪽에 가장 프라이빗한 남편 고현 씨의 작업실이 자리해 있다. 마지막으로 계단을 오르고 골목길을 지나면 3층, 부부의 집이 등장한다. 이해든 소장은 현관의 위치를 최대한 안으로 들여 골목길이 마당처럼 느껴지도록 하는 동시에 동네의 장면을 집으로 끌어들였다. 외부의 감각은 집 안에서도 이어진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오면 벽돌과 비슷한 타일로 마감한 복도가 있고, 한 단 더 올라가면 마룻바닥을 깐 거실이 펼쳐진다. “실외에서 실내로, 거실은 바닥을 높여서 조금 더 내부로, 침실은 벽과 천장을 더해 더욱 내부가 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바깥에서 안으로 한 겹씩 들어가면서 건물이 지닌 시간을 공간의 경험으로 치환했어요.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데에는 건축주가 사는 방식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두 분은 직장과 집, 삶과 일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위스키 바도 하고 패브릭도 팔고 팝업도 열던 무용소처럼요. 이곳 역시 여러 성격이 자연스럽게 뒤섞이며 두 분의 일상을 잘 받아주는 공간이 되고자 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이어달리기
건축가가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경계를 넘나들도록 만든 집에서 부부는 자신들에게 꼭 맞는 옷을 입은 듯한 안정감을 느낀다. 암벽에 맺힌 습기를 살피며 날씨를 감각하고, 인왕산이 지척인 동네에서 계절이 머무는 순간을 만끽하며, 건물의 시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중이다. “저희는 아이가 없는데, 어느 날 문득 이 집이 자식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사람은 태어났을 때 완성된 존재가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집도 태어난 후에 계속 자라는 과정 중에 있는 것 같아요. 1백 년 된 이 집도 저희와 살면서 그다음 30년, 40년 고치고 가꾸고 또 함께 자라가면 좋겠습니다.”


이해든 소장 역시 비슷한 마음을 이야기했다. “레노베이션을 하다 보면 처음에 어떤 뜻을 갖고 이 집을 지은 사람과 이어달리기를 하는 기분이 들어요. 저도 누군가에게 바통을 넘겨줘야겠다는 감각을 갖고 작업을 하다 보니 지나온 시간을 공간의 경험으로 바꿔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요. 이 집도 그렇게 지어지는 과정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의 누군가도 바통을 잘 이어받기를 바라면서요.” 건축주와 건축가의 마지막 소회를 들으며 알았다. 레노베이션은 건축물을 자라나게 하는 일임을. 건축가가 보살피는 마음으로 고치고, 건축주가 같은 마음으로 가꿔가며 백년양옥은 다음의 시간을 이어 달리고 있다.
전문가
이해든, 최재필 | 오헤제 건축
이해든, 최재필 소장은 단국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건축사사무소 사무소효자동을 거쳐 도쿄 예술대학 미술연구과 건축 전공 석사과정을 이누이 구미코 연구실, 톰 헤네간 연구실에서 수료했다. 2016년 도쿄 예술대학 재학 중 오헤제건축을 설립하고, 2017년부터 서울에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신건축 국제주택설계경기 2007 2등, 도쿄 예술대학 요시다 이소야 수료제작상, 도쿄건축컬렉션 요코미조 마코토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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