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신민영 씨에게 채소는 먹는 재료인 동시에 보고 만지고 살피는 대상이다. 얇게 잘랐을 때 드러나는 단면과 색, 손끝에 닿는 섬유질의 결, 빛을 통과할 때 달라지는 표정까지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이러한 시선은 미국 유학 시절 음식과 관련한 경험에서 비롯됐다. 집이 그리울 때마다 어머니에게 레시피를 물어 고향 음식을 만들었고, 주말이면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요리하고 식사했다. 설날이면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만두를 빚었다. 한국의 명절 문화를 소개하려고 가볍게 시작한 자리였지만, 만두피를 펴서 소를 채우는 동안 친구들은 자연스레 저마다 고향에서 먹던 만두와 가족에 얽힌 기억을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생김새와 이름은 달라도 음식에 깃든 그리움과 온기는 서로 닮아 있었다. “음식이 단순히 먹는 것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가장 직관적 언어라는 것을 그때 온몸으로 느꼈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를 함께 먹는 이 행위 자체가 내 예술 작업이 될 수는 없을까?’라는 질문이 마음속에 싹텄죠.” 그런 경험은 그가 음 식을 바라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하나의 식재료가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자연과 계절, 농부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지만, 정작 우리가 맛보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 그는 어떤 음식은 한 끼의 기억으로 남지만, 어떤 음식은 종이가 되어 오랫동안 곁에 머물 수 있음을 발견했다.



한 장의 종이에 남긴 계절
그의 작업은 시장에서 시작된다. 이를테면 서울의 마르쉐 채소 시장과 뉴욕의 유니언 스퀘어 그린마켓은 다양한 농부가 기른 제철 식재료를 접하고 작업의 실마리를 얻는 곳이다. 가능한 한 누가 어디에서 기른 것인지 알 수 있는 재료를 고르고, 농부에게 그해 작황과 재배 방식도 묻는다. “제게 시장은 재료를 사는 곳이라기보다 계절을 수집하는 곳에 가까워요. 지금이 아니면 접할 수 없는 식재료에 특히 마음이 가요.”
낯선 색이나 낯선 무늬가 있는 채소를 발견하면 어느 방향으로 잘라야 단면이 잘 드러날지, 종이가 되었을 때 빛을 어떻게 통과시킬지 떠올린다. 재료를 깨끗이 손질해 얇게 썬 뒤 살짝 데쳐 조직을 부드럽게 만들고, 한 조각씩 배열해 무거운 돌로 눌러 3~5일 동안 말린다. 풀이나 접착제를 쓰지 않아도 식재료에 남아 있는 점성과 섬유질이 압력을 받으며 서로 붙어 한 장의 종이가 된다.
온도와 습도에 따라 마르는 속도는 물론 색과 질감도 달라진다. 같은 재료를 사용해도 결과가 매번 같지 않은 이유다. 충분히 말랐는지는 손으로 만져 확인한다. 빛에 비췄을 때 드러나는 섬유의 결이나 종이를 움직일 때 나는 소리도 살핀다. “무를 가장 자주 사용해요. 흰색뿐 아니라 분홍·보라·초록 등 색이 다양하고, 얇게 말리면 무명천처럼 은은한 질감이 나타나거든요. 오크라는 점액질이 많아 다루기 어렵지만, 완성하면 레이스처럼 섬세한 단면이 드러나서 특히 보람을 느끼는 재료예요.”


책과 조각보, 다시 식탁으로
처음 채소 종이를 만든 뒤 떠올린 질문은 여러 형식의 작업으로 이어졌다. 가장 먼저 만든 것은 책이었다. 아티스트 북 〈Vegetable Paper〉에는 미국 피츠버그에서 접한 제철 채소로 만든 종이 40종을 엮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색과 투명도가 달라지며, 그곳에서 보낸 계절이 차례로 펼쳐진다. 플립 북 〈One Radish Book〉은 무 한 개를 1백9개의 단면으로 나누어 자른 순서대로 촬영한 작업이다. 책장을 빠르게 넘기면 무의 안쪽을 천천히 통과하는 듯한 장면이 이어진다. “책은 누군가 손으로 페이지를 넘길 때 비로소 완성되는 오브제라고 생각해요. 한 장씩 넘기는 행위 자체가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는 과정이니까요.”
무 종잇조각을 이어 붙인 ‘Radish Jogakbo’에는 한국 조각보의 작업 방식이 담겼다. 자투리 천을 버리지 않고 이어 붙여 새로운 면을 만들듯, 종이를 만들고 남은 채소 조각도 버리지 않고 콜라주에 활용한다. 신민영 씨는 음식을 만드는 일과 바느질 모두 오랜 시간 재료를 살피고 손으로 다듬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닮았다고 말한다. 그에게 부엌과 작업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채소 종이는 다시 식탁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뉴욕 레스토랑 아토믹스Atomix와 함께 작업한 프로젝트 ‘Vegetables’에서는 아홉 가지 채소 종이를 메뉴 카드에 적용했다. 손님은 요리를 맛보기 전, 메뉴 카드에 담긴 채소의 색과 결을 먼저 마주한다. 같은 계절의 식재료가 종이와 음식이라는 서로 다른 형태로 한 끼 안에서 이어지는 것이다.
최근에는 한국의 봄나물을 처음으로 종이로 만들었다. 짧은 기간 동안에만 만날 수 있는 나물의 색과 섬유질을 한 장 한 장에 담아낸 작업이다. “앞으로는 한국의 다양한 식재료를 종이로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같은 재료로 요리한 음식도 함께 선보일 계획입니다. 제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것은 직접 작물을 기르고 수확해 요리한 뒤, 남은 재료로 종이를 만드는 일이에요.” 이렇듯 신민영 씨의 작업을 따라가다 보면 무심코 지나치던 채소 하나에도 한 계절의 시간과 그것을 길러낸 누군가의 손길이 깃들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전문가
신민영
신민영(Jennifer Shin)은 음식과 종이, 전통 수공예를 바탕으로 집과 기억 및 사라지는 것의 의미를 탐구하는 시각예술가다. 미국 카네기멜런 대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제철 식재료와 일상의 사물을 반복적인 손작업을 통해 조각과 책 또는 설치 작품으로 변환하며, 최근에는 음식을 활용한 설치와 다이닝 프로젝트로 작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