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마 끝으로 계절이 흐르고, 창살 너머로 맑은 빛이 조용히 내려앉는다. 북촌의 좁은 골목 끝에 자리한 한옥 백우재는 번잡한 도심에 숨은 단정한 사유의 공간이다. 궁궐을 짓는 대목수의 골조와 무형문화재 장인의 창호로 전통의 뼈대를 단단히 세우고, 그 안에 호텔의 쾌적한 시스템과 사계절을 끌어안는 차경의 미학을 채웠다. 누군가를 위한 따뜻한 쉼터로 지었다가 마침내 머무는 이의 일상을 정돈하는 완벽한 아지트가 된 곳. 전통의 고즈넉함과 현대의 쾌적함이 우아하게 교차하는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는 사람 이야기
북촌의 좁다란 골목길을 걷는 관광객 사이로 한참을 가다 보면 백우재에 다다른다. 골목 안쪽으로 한 겹 더 들어선 뒤 대문을 열면 아담하지만 잘 정돈된 마당이 손님을 반긴다. 백우재 건축주 백승우 씨를 소개하려면 여러 수식어가 필요하다. 서울 시내 유명 체인 호텔의 최고 경영자이자 12년 넘게 이어온 궁궐 해설 자원봉사자, 해외 전시는 물론 직접 쓰고 찍은 책을 펴낸 사진작가다. 다방면의 삶을 살아온 그가 도심 한복판에 이 한옥을 지은 이유는 단순했다. “2014년부터 궁궐 문화재 해설 자원봉사를 하고 있어요. 주말마다 고생하는 동료 봉사자들이 한낮에 물 한 모금 마실 곳도, 교육받을 공간도 마땅치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분들을 위한 쉼터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백우재의 시작이었죠.”



이러한 선한 의도는 건축 과정에서 그의 사적 취향과 결합하며 더 풍성한 공간으로 발전했다. 주말에는 궁궐 문화재 해설 자원봉사자들의 쉼터이자 교육 공간으로 쓰지만, 평일에는 회사 동료들의 회의 장소로, 때로는 그의 서예와 더블베이스 연습실로 쓴다. “만들다 보니 평일이나 저녁에 와서 책도 보고 음악도 즐기면 좋겠다 싶었죠.” 백우재는 그렇게 그만의 도심 속 별서別墅가 되었다. ‘함께’의 의도를 품은 덕분일까? 이 집에 들어서면 그의 사적 공간이 아닌 모두를 위한 공유 공간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큰 테이블과 TV 및 스피커로 꾸민 거실을 지나면 아담한 주방이 이어진다. 주방 옆에는 바위만 한 대문이 떡하니 서 있는데, 실제 이 집의 바깥 대문을 실내로 옮겨놓은 것이다. “건축주의 개인 공간을 안쪽으로 양보하고 바깥쪽에 공유 공간을 마련해, 이곳에 오는 분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대문을 안쪽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이곳을 시공한 참우리건축사사무소 김원천 소장은 문을 안으로 들인 이 집을 지은 이가 다름아닌 창경궁 양화당을 지은 대목수라고 설명했다. 일반 건축가가 아닌 궁궐을 짓는 장인의 손길이 이 한옥의 뼈대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셈이다.


지은 사람 이야기
사계절의 풍경을 품은 한옥
그는 이 집에서 사계절 풍경을 온전히 누리기를 원했다. 그래서 집 안 곳곳에 다양한 형태의 창을 내 봄·여름·가을·겨울의 장면을 언제나 감상할 수 있게 연출했다. 앞마당에는 창경궁의 고즈넉한 봄빛을 옮겨오듯 홍매화를 심어 사계절의 첫 페이지로 삼았다. 주방 쪽 큰 창으로는 초록빛 여름 풍경을 담았고, 화장실에는 벽 아래쪽에 나지막한 창을 내 소복이 쌓인 겨울 눈을 볼 수 있게 했다. 거실 한쪽에 놓인 디지털 액자 역시 사계절을 품는 또 하나의 창이다. 오랜 기간 사진 작업을 이어온 백승우 씨는 매주 삼청동 등 도심을 산책하며 직접 포착한 계절 풍경을 이 액자에 담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바뀌는 화면 속 풍경은 자연의 변화를 집 안으로 고스란히 끌어들인다.

한편 창경궁 명정전의 창살을 그대로 재현한 내부 창호도 눈길을 끈다. “이 창살을 언뜻 보면 연꽃 모양 같지만, 사실 불교의 법구 중 가장 강력한 기운을 지닌 ‘금강저’ 문양을 교차해 엮어 만든 거예요. 우리나라 무형문화재 소목장인 심용식 선생님께서 만들어주셨습니다. 시각적으로도 아름답지만, 나쁜 기운을 막고 공간을 단단하게 지켜준다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죠. 아침이면 해가 집 안에 쫙 비치는데, 바닥 전체에 온통 연꽃잎이 흐드러지게 피어나요.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 감사한 인연으로 지금은 제가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 직접 창호 제작을 배우고 있어요.”
40년 넘게 호텔을 경영해온 그의 이력은 전통 외관 속 세심한 ‘호텔식 디테일’로 스며들었다. 이산화탄소 수치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외부 공기가 100% 쾌적하게 순환하도록 구축한 천장 환기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휴양지 리조트의 콘셉트를 차용하고, 가구와 소품 배치 하나까지 호텔식 매뉴얼과 정돈의 미학을 촘촘히 적용했다. 누군가를 위한 따뜻한 나눔에서 출발해 사계절의 결을 묵묵히 담아내는 사진가이자 호텔리어의 감각이 닿은 곳. 백우재는 전통 한옥의 아늑함 위에서 오늘도 찾아오는 이들에게 고요한 사유와 깊은 쉼표를 건넨다.



백우재 in 행복작당 북촌
10월에 열리는 행복작당 북촌에 백우재가 함께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행복> 홈페이지 또는 SNS에서 확인해 주세요.
전문가
김원천 | 참우리건축
김원천 소장은 참우리건축의 대표 건축가로,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건축을 지향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장인들과 협업해 다채로운 형태의 집을 완성해 간다. chamoor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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